본문 바로가기
기념일

"2.28 민주운동에 이어 민주운동 시즌2" 봄 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3.15의거 기념일]

by 고효길 2023. 12. 29.
반응형

3.15의거 기념일 내용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나무위키

날짜

매년 3월 15일이다.

의의/목적

1960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반발하여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을 기념하는 법정기념일이다.

반응형

역사/유래

3.15의거 전 배경

이승만 정권은 1954년 영구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단행한 데 이어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자 국민/야당/언론 등 사회 전반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58년에 실시된 제 4대 님의원선거에서의 불법선거 자행과 더불어 국가보안법, 지방자치버 등을 개악하여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는 법적 기초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후에도 이러한 독재정치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정/부통령선거는 전국적인 범위에서 광범위한 부정선거로 얼룩지게 되었다.

TMI 사사오입 개헌

간단 설명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해 1954년 11월 29일 불법적으로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킨 사건. 우리나라 헌전사상 제2차 개헌.

개헌안 주요내용
- 국민투표제 가미
- 순수한 대통령제로의 환원
- 경제제도의 자유경제체제로의 수정
-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의 승계제도
-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제한 조항 철폐

개헌 이야기
이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이승만 정권은 [뉴델리 밀담설]을 조작, 극우반동의 본산인 민국당(민주당)을 용공으로 몰아가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나, 11월 27일 국회에서 표결에 붙인 결과 재적 203명 중 가 135표, 부 60표, 기권 7표로 개헌 정족수인 136표에 1표가 미달, 부결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자유당 정원은 [국회의원 재적 203명의 2/3는 135.333....인데 0.333...이라는 소수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의 인간이 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하면 203명의 2/3는 135명이 된다]는 억지주장으로 이틀 후인 29일 부결선언을 번복, 개헌안을 가결을 선포했다.

그 결과
사사오입 개헌은 절차상으로도 정족수에 미달한 위헌적인 개헌이었을 뿐만 아니라. 1인의 종신집권을 보장한 개헌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헌정사상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이 개헌파동으로 손권배/김영삼/김재곤/김재황/김흥식/민관식/성원경/신정호/신태권/이태용/한동석/현석호/황남팔 등 자유당 소장파 의원들이 무더기로 탈당하는 한편, 민국당(민주당)은 무소속 국회의원들을 규합, [호헌동지회]를 구성함으로써 민주당 창당의 계기를 만들었다.

 

3.15의거 발단

이승만 자유당 정부는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기집권을 위해 선거 준비 과정에서부터 노골적인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이에 선거 준비 과정 중인 2월 28일, 대구에서는 학생들의 첫 시위(2.28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당시 대구에서 민주당 유세날에 학생들이 유세에 참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에도 고등학생들을 등교하게 하였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정부의 불법적 선거 개입을 비판하는 시위를 일으키게 된다.

민주당 마산시당 앞에 집결한 시민들/3.15 규탄성명서 [출처 : 나무위키]

3.15 선거 당일 부정선거 정황이 발견되다.

그러다가 3월 15일 선거 당일 자유당 정권은 사건 투표, 3인조/9인조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온갖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부정행위 결과로 개표 과정에서 부통령 이기붕의 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면서, 이를 79%로 하향 조정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공공연한 부정행위가 목격되자 마산 시민들은 "협잡선거 물리쳐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TMI 추가적인 내용
선거 당일 번호표가 나오지 않아 투표를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속출한 데 이어 민주당의 투표참관인 다수가 참관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부정선거의 정황들이 곳곳에서 포착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민주당 마산시당이 오전 10시 30분경 선거포기를 선언하고 투표소에 배치되었던 민주당 참관인들을 모두 철수시키는 한편 곧바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1차 의거

3월 15일 오후 3시 30분경 민주당 마산시 당원 20여 명과 1천여 명의 시민/학생들이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며 남성동 파출소/부림시장/오동동/수성동/어업조합/불종거리로 행진했으나 오후 5시경 경찰이 소방차량을 동원하여 빨간 물을 뿜대기 시작하자 일시 해산하였다.

 

이어 오후 6시경에는 개표가 진행될 예정이었던 마산시청 앞에 모인 군중들에 의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다시 전개되기 시작하여 순식간에 마산/창원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경찰의 강경 탄압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파출소 공격과 경찰들의 총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창원 지역에서는 시민들이 창원군청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때 8명의 사망자와 123면의 총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주모자로 구속된 26명은 공산당으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김주열군의 참혹한 모습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2차 의거

1차 의거가 발생한 지 27일 만인 4월 11일 오전 10경 1차 의거 당시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눈에 맞고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김주열 열사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에서 발견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한 시민들이 시신이 안치된 도립병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경찰서, 5개 파출소, 도립병원 등을 돌면서 다시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다음 날인 4월 12일에는 마산 지역의 고등학교 학생들도 시위를 전개하였다. 오전 10시경 마산공업고등학교 학생 500여 명이 "민주정치 되살리자"며 거리로 나선 데 이어 창신고등학교, 마산여자고등학교, 마산고등학교 학생들도 합류하여 시가행진을 하다 김주열의 주검 앞에 묵념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이후 오후 7시경에 이르자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마산시청을 점령하고 경찰서와 파출소를 공격했으며 시위는 13일에도 계속 이어졌다. 창원 지역에서도 창원군청 일대를 중심으로 시위가 전개되었다.

728x90

그 결과 4.19 혁명으로 이어지다.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시위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에 이어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경찰은 또 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4월 25일 대학교수들의 시국 선언문 발표 등이 이어지자,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하게 되었으며 자유당 정권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에 있는 동상 [출처 :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한 어부 등 11명, 진실규명 결정 (naver.com)]

김주열

인물 일대기

본관 김해, 전라북도 남원 출생 남원금지중학을 졸업하고, 1960년 마산상고에 지원하였다.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 김광렬과 함께 마산에 갔으며, 발표일이 연기되어 마산에 잔류하였고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실종되었다.

 

실종 이후

실종 27일째인 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유기되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발견되었고, 이것이 경찰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학생과 시민의 분노가 또 다시 폭발하여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 현재

1995년 마산용마고등학교(구 마산상업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으며, 1999년 김주열 열사 추모 사업회가 발족하였다. 매년 4월 11일 마산에서 추모식이 거행되고 있다. 

 

조소앙 사진 [출처 : 나무위키]

뉴델리 밀회 사건(밀담설)

간단 설명

1954년 자유당 정권이 보수야당인 민국당(민주당)을 용공으로 몰아 개헌반대 운동을 제압하고 개헌비판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조작/유포한 남북협상설.

 

이야기 내용

이야기의 시초(시작)

1954년 10월 26일 당시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의선전부장 함상훈은 [전 국민당 동지에게 소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같은 당의 신익희가 1953년 6월 거행 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참석을 계기로 약 4개월 간 해외순방을 하면서 7월 26일 인도 뉴델리에서, 한국전쟁 당시 납북당한 후 북한의 남북협상총선거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조소앙을 비밀리에 만났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함상훈이 이야기를 덧붙이다.

이에 덧붙여 함상훈은, 신익희와 조소앙이 비공산주의, 비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제3세력을 규합하여 남북협상을 추진하기로 했으며, 그 세력들이 현재 민주국민당 내부까지 침투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이미 10월 20일 여당인 자유당계 신문으로 알려진 [국도신문]에서 제기한 같은 내용의 의혹을 확인한 것이다.

 

의혹을 부인하다.

함상훈의 성명 직후인 10월 27일 민주국민당은 당무회의를 열어, 함상훈이 전혀 근거가 없는 악의에 찬 허위 사실을 여당계 신문에 제공하고, 이후 더욱 불순한 책동을 노골화했다는 이유로 그를 당에서 제명하였다. 그러나 함상훈은 제명 이후에도 같은 주장을 계속 반복하였고, 심지어 신익희가 귀국 이후에도 남파된 조소앙의 특사를 만났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결국 이 문제는 국회로까지 비화되었다. 특히 함상훈의 성명 직전인 1954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의 중임 제한 철폐와 국민투표제 신설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상정한 자유당은 이 사건을 개헌에 반대하는 야당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정치 공작으로 이용하다.

자유당 정권은 [뉴델리 밀담설]을 개헌 공장에 이용, 납북협상이니 중립화니 하는 국가안보 및 국체변경과 직결된 중요사안을 국민투표에 붙이려는 이번 개헌안은 국민의 기본권을 확대하려는 의도이지 1인장기집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선전공세를 폈다. 결국 자유당 정권은 극우보수파인 민국당(민주당)을 용공으로 몰아붙이는 한편, 국민투표제를 빌미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규정철폐]를 관철시키려는 의도로 이 밀담설을 조작/유포한 것이다.

 

그 후 이 사건의 결과

훗날 통합야당으로 출범한 민주당에서 1957년 당내 분규가 일어났을 때 김주연과 조병옥은 서로 상대방을 함상훈 성명의 배후로 비난한 바 있었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민주국민당 내 강경보수파였던 김주연이나 조병옥이 유화파였던 신익희를 제거하기 위해 함상훈을 앞세워 소위 [뉴델리 밀회설]을 흘렸다는 추정이 있기도 하다.

 

또한 당시 개헌을 추진 중이었던 자유당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야당을 [제3세력]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공격을 통해 반공안보 분위기를 고조시켜, 개헌안에 유동적이었던 자유당 국회의원들이 야당에 동조하는 것을 견제하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