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념일

"우리나라 해군 사건 중 잊지 말아야 할 사건" 봄 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3월 넷째 주 금요일 서해 수호의 날]

by 고효길 2024. 1. 1.
반응형

서해 수호의 날 기념일 내용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나무위키

날짜

매년 3월 넷째 주 금요일

TMI 3월 넷째 금요일인 이유
군의 희생이 가장 많았던 천안함 피격일(3월 26일 금요일)을 기준으로 정했다.

의의/목적

천안함 침몰 사건(2010), 연평도 폭격(2010), 제2연평해전(2002) 등 서해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웅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법정기념일.

TMI 매년 해당 기념일이 되면 서해 수호 호국영웅이 안장된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기념행사를 시행한다. 이 행사는 호국의 희생을 기리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며, 서해 도발 사건을 잊지 않도록 하여 국가 안보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반응형

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나무위키

[출처: 軍, “제2연평해전 전사자 합동묘역 적극 검토” (naver.com)]

제2연평해전

 

간단설명

2002년 6월 29일 오전 서해 연평도 서쪽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의 선제 기습 포격으로 시작된 남북 함정 사이의 해전.

역사/유래

연평해전 시작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 25분 무렵,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3마일,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일어났다.

TMI 1999년 6월 15일 오전에 발생한 제1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 만에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남북한 함정 사이의 해전이다.

 

명칭 변경

[서해교전]으로 불리다가 2008년 4월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되었다.

이야기

이야기의 시작... 북한의 선제 공격

2002년 한일 월드컵 3/4위전(대한민국 : 터키)이 열리던 6월 29일 오전 9시 54분 북한의 경비정 중형 1척과 대형 1척이 연평도 서쪽 7마일 해상에서 NLL을 침범하였다. 이에 우리 해군 고속정 253편대(참수리 357호정 358호정)가 출동했으나, 10시 25분 북한 경비정은 참수리 357호 고속정을 향해 선제공격을 가했다.

TMI 자세한 내용
2척의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과 등산곶(육도)388호정이 NLL을 1.1km 침범하였고 이에 해군 고속정 4척이 교전수칙대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참수리 편대는 각 편대별로 경비정 1척씩을 맡아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는데 이 중 684를 맡은 232편대에서는 편대장 김찬 소령이 좌승했던 기함인 358정이 선두를 맡고 357정은 300야드(274m) 정도 뒤에서 북한 경비정 쪽으로 접근하였다. 이윽고 참수리들이 차단 기동을 실시하기 위해 684의 저진방향의 횡으로 가로지르기 시작했고 684가 358을 지나친 순간 갑자기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358정의 뒤를 따르던 357정은 갑자기 정지한 684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었고 이로 인해 357의 좌현이 그대로 684에 노출되었다. 이때 두 함정의 거리를 500야드(457m)로 북한 경비정의 조악한 수동 조작식 구형 육군용 대공포 및 신형 취급받던 T-34-85의 주포 ZIS-S-53 85mm 전차포로 철갑탄을 쏘더라도 초탄 명중이 가능한 거리였고 무엇보다 78식 저격보총의 사거리 내였다. 북한 경비정이 경고 사격없이 선수의 ZIS-S-53 85mm 전차포를 357호정에 사격함으로써 교전이 시작되었다.

 

한국 바로 반격하여 승리하다.

이후 경비 중이던 초계함과 인근 고속정 등이 교전에 가담해 대응하격을 실시한 결과, 집중포격으로 크게 격파된 북한 경비정은 화염에 휩싸여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10시 43분 퇴각하였다. 이로써 약 30여 분의 교전 끝에 우리 해군은 NLL을 사수하고 제2연평해전에서 승리하였다.

TMI 자세한 내용
기습 포 발사로 인해 윤영하 소령과 한상국 상사 전사
북한 중형 경비 초계경에서 예고없이 발포된 85mm포 기습발사를 시발점으로 북한과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사격대응명령을 내린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은 초탄 명중 이후 4분 후인 37mm 포탄이 함교에 명중해 아비규환이 된 찰나 저격수의 총탄에 등을 피격당해 몸을 떨다가 눈을 감고 일자로 누운 채 전사하였다. 이후 이희완 부장이 의식이 없는 정장을 대신하여 지휘권을 행사하였고 조타장 한상국 상사(당시 중사(진)) 역시 조타실 피격으로 전사하고 디타 승조원들이 중상을 입었으며 이어진 사격으로 인해 엔진이 정지되고 전력 공급 기기가 파괴되어 357정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이희완 중위 발칸포를 수동으로 조작하다
엔진이 정지하여 전력이 끊긴 상황에서 부장 이희완 중위(2023년 현재 대령)이 왼쪽 다리엔 고사총 탄두 관통상, 오른쪽 다리는 37mm 2연장 고상포탄에 부상당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두지휘를 감행하였으며 20mm시 발칸포가 전기 계통이 나간 상황에서도 비상 전력을 가동하고 공기 유압 펌프나 스위치 등으로 어떻게든 포를 조작하여 수동으로 발사했다.

이어 황도현 중사와 조천형 상사, 서후원 중사 전사
전투가 시작되고 대응 사격을 한 지 12분 후 20mm포 시 발칸 담당 병기부사관 황도현 중사(당시 하사)는 적의 집중 사격 속에서 헬멧을 쓴 두부에 37mm 포탄을 맞아 두부의 3분의 1이 포탄 탄두에 함몰되어 없어진 상태로 방아쇠로 잡고 안은 채 전사하였고 조천형 상사(당시 중사(진))가 21포에서 응전하던 중 등산곶 684호정 함교 뒷편 포좌의 ZPU-4 14.5mm 4연장 고사총과 포대 37mm 2연장 기관포 등의 집중 사격을 받던 중 포탑 내부에서 화재가 발생해 전신 화상을 입고 질식사한 채 방아쇠를 자고 안고 있었다. M60 기관총을 맡고 있던 내연부사관 서후원 중사(당시하사)도 교전 중에 684에 승조한 저격수에게 왼쪽 흉부를 관통당하고 전사했다.

박동혁 상병 재기 불능 상태
갑판에서 소병기 사격을 담당하던 승조원들과 기관실, 통신실에 있던 승조원들 다수가 벽을 관통한 총포탄과 7호 발사관 등의 파편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그 와중에 의무병 박동혁 수병(당시 상병)은 5군데나 총상과 파편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조원들의 구호를 위해 분투했지만 서후원 중사가 684호에 승조한 함상저격수에게 왼쪽 가슴 심장 부분에 7.62mm 총탄 한 발, 오른팔에 파편을 맞고 쓰러지자 분노하여 M60 기관총을 부여잡고 난사하다가 적의 집중적인 소병기 사격에 재기 불능 상태가 되었고 이를 보다 못해 극까지 참은 분노가 터져 버린 권기형 상병은 자신의 왼손이 고사총과 파편에 부서져 왼쪽 손가락을 못 쓰는 상태로 서 중사가 전사한 거치대 앞에 뛰쳐나가 서후원 하사와 박동혁 상병이 쏘던 M60 기관총을 부여잡고 오직 오른손만으로만 남은 잔탄을 그대로 등산곶 684호에 전탄 발사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병기장 황창규 중사가 사격을 마치고 나온 41포에 들어가 684호에 발사하려던 것을 황창규 중사가 그러다 죽는다며 함내로 끌고 들어갔다고 한다.

대응 사격하다.
참수리 358정은 즉시 대응 사격을 하려 했지만 북한 경비정이 357정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너무 가까운 거리라 사격 통제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서야 북한 경비정을 공격할 수 있었지만 북한 경비정은 358에서의 공격은 일체 무시하고 357정만을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358호정은 단 한 발도 피격되지 않고 사상자 및 함정 손상도 발생하지 않았다.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한국 해군 PCC들이 급히 북상했지만 북한이 지상 기지에서 실크웜 대함 미사일(스틱스 대함미사일의 개량형)을 발사할 준비를 하는 것이 감지되었고 북한 해안의 해안포 때문에 함포 사거리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6명 전사, 19명 부상

그러나 북한의 기습적 포격으로 인해 참수리 357호 고속정은 예인 도중에 침몰됐으며, 정장 윤영하 소령을 비롯해 한상국 상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의 해군 승조원들이 전사하고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2012년 6월 제2연평해전 10주년을 기념하여 윤영하함, 한상국함, 조천형함, 황도현함, 서후원함, 박동혁함 등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6용사를 함명으로 한 유도탄고속함(PKG) 6척이 서해 합동 해상기동훈련에 참가하기도 했다.

TMI 자세한 내용
한국측 피해
최초 보고는 4명 전사, 19명 부상, 실종 1명, 무사고 4명이었다. 하지만 실종된 한상국 상사가 SSU 대원들에 의해 바다 속에 가라앉은 357정의 조타실에서 발견되었고 의무병 박동혁 수병이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6명 전사, 18명 부상으로 최종 집계되었으며 참수리 357정이 대파당한 것 때문에 전투후 과다로 최종 격침당했다.

북한측 피해
북한 해군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은 교전 중반인 85mm 전차포로 85mm 철갑탄 초탄 발사를 한 지 720초에서 1200초가량 지난 후에 모든 포탑이 파괴되어 포격 불능 상태가 되고 다수의 포수(서주철 등은 제외)나 고사층 사수들이 사망해 7호 발사관과 88식 보총, 73식 대대기관총 등의 소병기 공격만 주고받았다. 아군 고속정의 집중 공격을 받고 조타가 불가능한 상태로 계속 빙글빙글 돌다가 북측 경비정의 예인을 받고 25분 만에 퇴각하였다.

지원을 한 3척의 대한민국 해군 측 고속정에서 관측한 자료에선 684의 갑판에 나와 있던 승조원 대부분이 피탄당하여 쓰러지는 광경이 관측되었다. 군사정보지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인민군의 피해는 경비정 대파, 사망 13명(함장 김영식 대위 포함), 부상 25명 등 38명 사상이라고 한다.

해전 이후 북한 측 입장

대한민국 국방부는 북한의 선제 공격 행위를 "명백한 정전 협정 위반이며, 묵과할 수 없는 무력 도발"로 규정하고 북한 측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요구하였으나 북한은 국방부의 요구를 무시한 데다 우발적 충돌이라는 통지문을 보내 왔다. 여기서 유감이라고 했던 것에 대해 이것이 사과인가에 대해선 대한민국 서 의견이 분분하다.

728x90

북한의 포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당시의 연평도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연평도 포격 (naver.com)]

연평도 포격전

 

간단 설명

2010년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에 대한 기습적인 포격 도발에 맞서 해병대 연평부대가 K-9 자주포로 즉각 대응한 전투를 말한다. 이는 1953년 7월 휴전협정 이래 민간을 상대로 한 첫 대규모 군사 공격 사례다.

이야기

사건이 일어나기 전 상황

북한군은 2010년 11월 23일 오전부터 호국 훈련을 실시한 대한민국 국군에게 실질적인 침략행위라고 항의하였고 대한민국 국군은 기존의 훈련이라고 통지문을 보냈다. 게다가 이후 기사에 따르면 호국 훈련보다는 그냥 일상적인 사격훈련이었다고 한다.

 

한국은 당시 중국은 아시안게임을 진행 중이었고 주권지역 인근에서 문제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고, 조중동맹조약에 따라 중국은 어디까지나 북한이 선제 공격을 당한 상황에서 발발하는 전쟁에만 개입하도록 되어 있다.

 

사건의 시작

11월 23일 오후 2시경 연평도에서 하늘에서 무언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으며 굉음과 함께 연기가 올라왔다. 당시 하교하던 연평초등학교 학생들은 무방비 상태로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때는 연평어린이집의 원생들이 낮잠을 자는 시간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군인의 안내를 받아 대피소 안으로 피신했고 이후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있는 대피소에 모여서 컵라면을 먹고 그곳에서 잠을 잤다.

 

해병대 연평부대측 상황

이 대위는 부대원들의 포 사격훈련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사격훈련이 모두 끝난 뒤 잠시 후 앞쪽에서 잇따라 폭발음과 함께 화염이 솟았다. 그 뒤 그게 적의 공격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고 "빨리 피해"라는 고함소리를 듣고는 정신없이 대피호 안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 폭발이 적의 폭격임을 파악하자 포병들은 자주포들을 일단 포상 내부로 숨기고(소산) 나머지 해병들도 대피호로 대피하였으며 14시 41분경 적의 포 공격이 멈추어 잠잠해지자 K-9 자주곡사포 3문을 포상 밖으로 다시 끌어내어 14시 47분경부터 대응사격을 시작했다.

 

대응 포격 후 상황 종료

대한민국은 당일 오전에 미리 예정된 호국 훈련 계획에 따라 정상적으로 훈련을 실시했다. 대한민국 해병대 연평부대도 호국훈련의 일환으로 남쪽 바다를 향하여 사격훈련을 했으나 북한은 이를 남한 측 도발로 규정하고 오후 14시 34분 대연평도에 기습적으로 포탄을 발사했고 남한 역시 14시 47분부터 이에 대응하였다.

 

북한군의 초반 포격에 한국군은 2대의 K-9 자주곡사포가 손상되었고 한국군은 남은 3대의 K-9 자주곡사포로 북한 황해남도 강경군 무도의 북한군 기지를 향해 50발의 보복 사격을 가했다. 30발쯤 사격할 때 1대를 긴급수리해 4대 투입. 이후 북한이 다시 레이더 기지를 노리고 개머리 반도에서 포격을 개시하자 한국은 다시 30여발의 포를 개머리 반도에 발사했다. 교전이 중지될 때까지 북한군은 총 170여 발의 포를, 한국군은 80여 발의 대포병 사격을 실시했다. 합동참모의장의 발표에 따르면 오후 3시 41분 일단 포격은 종료되었다.

TMI 북한측 포격 분석
북한군의 포탄 중 절반 정도는 바다에 떨어졌고 나머지가 연평도에 떨어졌다. 130mm과 75mm 포와 방사포탄을 사용했으며 또한 포격에 사용된 122mm 방사포바로켓 불발탄들이 연평도에서 발견되었다. 군 당국은 앞의 두 개로 영점 조준을 하고 방사포를 메인으로 때려버린 거 같다고 한다. 문제는 오차도 매우 크고 지상에 떨어진 것 중에서도 불발탄이 20여 발이나 되어 군이 수거하였다. 그러니까 지상에 낙하한 것만 불발탄 비율이 약 30%가 넘어갔다. 지상에 유효타를 본 것도 30% 정도다.

 

그 결과...

1시간 가량 북한군이 발사한 포탄들로 인해 군 막사가 파괴되고 인근 숲 등 10곳이 불에 탔고 떨어지는 포탄들 중 몇 개가 주민들이 사는 가구 위로 떨어져 민간인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상간 건물이 붕괴되었다. 또 해당 지역 소방서에는 차량이 1대뿐이며 전담 소방요원도 2명밖에 없는 데다가 전기도 끊어진 상황이라 진화 작업이 힘든 탓에 마을이 전소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다급히 24일에 소방차 24대가 긴급 투입되면서 포격으로 10여 곳에 발생한 산불과 가옥과 창고 등을 태운 주택가 화재까지 모두 진화되었다.

 

1,700여 명의 주민들이 대피를 완료했다. 포격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 오후 2시 20분에 인천항에서 온 여객선이 도착한 뒤 포격이 시작되자 미처 내리지 않은 원래의 승객과 부두로 도망쳐 온 주민 일부를 태우고 인천항으로 회항하기도 했다. 발발 직후 연평도로 향하는 모든 항로는 폐쇄되었고 23일 오후 11시 일부 주민들은 자기들의 어선으로 인천 본토로 대피하였으며 나머지 주민들은 방공호에 대피했다.

연평도 포격전 상황일지 [출처 : 나무위키]

다음 날인 24일부터는 본격적인 피난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해양경찰청(이하 해경)의 지원 하에 어린이, 노약자, 환자를 우선하여 346명의 주민들이 해경 경비함 두 척에 나눠 타고 오전 7시에 연평도를 출항, 오후 2시경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후 해경 공기부양정과 해군 공기부양정(러시아제 무레나급)이 167명을 추가로 더 태우고 오후 3시에 인천항에 도착했고 오후 7시에는 다시 추가로 17명을 태운 해경 경비정인 인천항에 도착했다.

 

25일에는 운항이 재개된 여객선과 해경 경비정을 이용하여 추가로 172명이 인천 본토로 피난했다. 25일까지 연평도 전체 주민의 80%에 달하는 1,115명이 인천으로 대피했고 남아 있는 민간인은 약 280명 선이었다.

TMI 외신들은 연평도 마을들을 둘러보며 유령도시란 표현까지 썼다.

 

처음에는 민간인 사망자는 없는 걸로 파악되었으나 11월 24일 오후에 민간인 2명의 시신이 새로 발견되었다. 이들은 시신은 25일 오후 4시 10분 인천 본토에 도착했다. 해병대원 2명 전사, 6명 중상, 10명 경상이며, 민간인 피해는 2명 사망, 3명 경상이다.

 

해병대 장병 중에서 중상자 4명을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소아던 중, 중상자 연평부대 소속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 두 해병이 전사했다. 두 해병에게는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천안함 [출처 : 나무위키]

천안함 피격 사건

 

간단 설명

2010년 3월 26일 밤 9시 22분 대한민국 백령도 남서쪽 약 1km 지점에서 포항급 초계함인 PCC-772 천안함이 초계임무 수행 도중 조선인민군 해군 연어급 잠수정의 어뢰에 공격당해 선체가 반파되며 침몰한 사건이다.

TMI 천안함
1987년 건조되어 1999년 6월 15일 제1차 연평해전에도 참가했던 역전의 초계함이다.

피격이 후

피격 이후 인근 지역에서 작전 중이던 포항급 초계함인 PCC-778 속초함과 백령도등지의 참수리급 고속정, 해경 함정에 의해 58명이 현장에서 구조되었으며 46명이 전사하였다.

TMI 실종/사망한 승조원 46명 중에는 제2연평해전에 참전해 부상을 입었던 박경수 중사도 포함되어 있다.

TMI 4월 15일 해저에 있던 천안함의 함미가 인양되었으며 4월 24일에는 함수가 인양되었다.

 

이후 수색작전 중 3월 30일 한주호 준위가 잠수병으로 순직했고 4월 3일 천안함 수색을 돕던 쌍끌이 민간어선 98금양호가 상선과 충돌해 2명이 사망하고 7명이 실종되어 직/간접적으로 10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하였다.

다국적 연합정보분석TF 결과

북한 잠수정 행방 근거

서해의 북한 해군기지에서 운용되던 일부 소형잠수함정(상어급)과 이를 지원하는 모선이 천안함 공격 2~3일 전에 서해 북한 해군기지를 이탈하였다가 천안함 공격 2~3일 후에 기지로 복귀한 것이 확인되었으며 다른 주변국의 잠수함정은 모두 자국의 모기지 또는 그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북한산 어뢰 부품들을 발견하다.

5월 15일 폭발 지역 인근에서 쌍끌이 어선에 의해 수거된 어뢰의 부품들, 즉 각각 5개의 순회전 및 역회전 프로페러, 추진모터와 조종장치는 북한이 해외로 무기를 수출하기 위해 만든 북한산 무기소개책자에 제시되어 있는 CHT-02D 어뢰의 설계 도면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어뢰의 후부 추진체 내부에서 발견된 "1번"이라는 한글 표기는 대한민국이 확보하고 있는 또 다른 북한산 어뢰의 표기방법과도 일치한다. 러시아산 어뢰나 중국산 어뢰는 각기 그들 나라의 언어로 표기한다. 북한산 CHT-02D 어뢰는 음향항적 및 음향수동추적방식을 사용하며 직겨이 21인치이고 무게가 1.7톤으로 폭발장약이 250kg인 중어뢰이다.

 

그 결과

1번이라는 표기는 북한 해군에서 일정 주기로 어뢰를 일괄 수거해 병탄창에서 분해, 정비 후 재조립하는데 이 때 부품별로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을 1번, 그 다음 것을 2번 하는 식으로 등급을 매겨 표기할 때 쓴다고 한다. 이렇게 같은 등급별 부품을 모아 가장 상태가 좋은 부품들로 구성된 1번 어뢰에는 부품들에 1번이란 표기가 들어가 있으며, 북한 해군 교리상 어뢰를 발사할 때 상태가 좋은 것부터 소모하게 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1발만 발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천안함 피격 사건에서 수거된 어뢰 부품에 1번 표기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어뢰 침몰을 부정하는 설

암초설

천안함은 암초에 들이받고 침몰했다는 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천안함의 함수 부분부터 손상을 입었어야 정상이며 앞서 말했듯 배가 옆으로 가지 않는 한 천안함 측면 중앙부가 정통으로 찢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소한 소나가 장착된 부분도 손상되어야 한다.

 

금속피로설(피로파괴설)

천안함은 금속피로로 인하여 스스로 배가 갈라져 침몰하였다는 설.

 

그러나 천안함보다 더 오래된 배도 멀쩡하며, 스스로 갈라질 정도로 군함의 관리를 부실하게 할 리가 없다. 무엇보다 측면이 갈갈이 찢어진 상태면 배의 [분해]라는 주장을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하다. 피로파괴는 미세한 금(크랙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절단면이 칼로 자르듯이 날카로운 것이 특징이다.

 

유실기뢰설

6.25전쟁 중에 살포한 다수의 기뢰 혹은 1970년대 백령도를 요새화하기 위해 설치한 기뢰가 회수되지 못한 채 유실되어 폭발했다는 설.

 

스크류를 잡고 있는 함선 하부의 샤프트에 그물이 걸려 말려 올라가 함선 밑에 밀착한 기뢰가 터진 상황을 가정한다. 스쿠류에서 제법 떨어진 부분에서 샤프트에 말려 올라온 그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서해 5도 인근 지역은 어민들과 해군 함정 등이 자주 왕래하는 지역이며 기뢰 설치 시점에서 적어도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천안함만이 이로 인한 침몰을 겪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힘들며 30여 년 이상이 지난 기뢰가 멀쩡히 작동할지도 의문이다. 또한 [1970년대 백령도 기뢰 잔류] 주장의 출처는 익명의 [전직 해군 고위급 인사]로 그 출처를 신뢰하기 어렵다. 김태영 당시 국방부장관은 제거 작업을 마쳤다며 해당 의혹을 부인하기도 했다. 또한 해당 기뢰들은 대잠수함용으로 쓰이는 폭뢰를 개조한 것으로, 스크류가 망가지는 수준 이상의 피해를 입히기 힘들 만큼 파괴력이 낮다. 즉, 설령 기뢰가 터졌다고 해도 PCC 정도 되는 배를 쪼개버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자침설(조작설)

음로론에 가까운 의견으로, 정치적인 이유로 한국과 미국 측에서 천안함을 스스로 침몰시켰다는설.

 

당연히 자체적인 근거는 없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