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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임시정부 수립일 대외적인 공표가 기준인가?"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feat. 김구 일대기

by 고효길 202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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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내용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날짜

매년 4월 11일이다.

 

의의/목적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기리기 위하여 제정한 기념일이다.

TMI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란?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국내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3권 분립의 민주공화제 정부이다.

 

역사/유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시초

1919년 4월 13일 3.1운동 정신을 계승해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중국 상하이 하비로 프랑스 조계 내에서 이동녕, 김구를 포함한 40여 명의 임시정부 요인들에 의해 수립 선포되었다.

TMI 사실 4월 11일 수립일이다?
임시정부의 설립 주체엿던 임시의정원(의장 이동녕)이 1919년 4월 10일 밤 10시에 개원, 국무총리 및 6개 부서의 총장과 차장을 선출한 후 조소앙, 신익희가 초안한 헌법을 축조심의하여 10개조로 된 임시헌장을 철야심의한 후 4월 11일 오전 신석우의 제정했다.

따라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일은 4월 11일이며, 4월 13일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사실을 대외적으로 선포해 정식으로 국가탄생을 공포한 날이라는 것이다.

근거
한국국민당의 기관지 [한민]에 "4월 11일이 임시헌장을 발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성립한 기념일"이라는 기록, 1920년 독립운동가 김병조의 [독립운동사략],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신문 [시사신보]에서도 4월 11일을 수립일로 언급했다는 점, 2018년 3월 26일 열린 임시정부 수립 제99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는 임정 수립일이 4월 11일임을 알려주는 사료가 추가 공개, 1922년 임정이 만든 달력 [대한민국 4년 역서]에서 4월 11일이 [헌법발포일]이라는 이름으로 국경일로 정하자는 제안을 제출한 사실, 광복 이후 국내로 돌아온 임정 요원들이 1946년 4월 11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열린 [입헌기념식]에 참석하고 찍은 기념사진을 통해서도 임정 수립일이 4월 11일임을 알 수 있다.

 

첫 기념행사 실시

임시정부 수립 60주년인 1979년부터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기념행사가 실시되었다.

 

법정기념일로 제정

1987년 제9차 헌법을 개정하면서 전문에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라고 밝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뿌리가 임시정부에 있음을 천명하였고, 1989년 12월 30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일을 정부기념일로 제정하였다.

 

본격적인 행사 시초

1990년부터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제71주년 기념행사부터 정부 주관 행사로 거행하고 있다.

 

기념일 날짜 변경

2018년 10월 30일 국무회의에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함으로써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2019년부터는 종래의 4월 13일에서 4월 11일로 날짜가 변경되었다.

TMI 기념일 행사
매년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기념관에서 3.1운동으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기리는 행사를 거행한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기념일은 민주공화제 정부로서 국민주권을 천명한 최초의 정부인 임시정부의 법통을 기리고 선열들의 순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날로 기념식에는 국무총리를 비롯한 3부요인, 정부 주요인사, 임시정부 관련 독립유공자 유족, 광복회원, 각계 대표, 시민이 참여한다.

기념식은 광복회장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경과보고를 시작으로 국무총리 기념사, 기념 축시 낭송 순으로 진행되며, 주요행사로는 기념식, 임시정부 요인 유족 위문, 사진전 개최, 선열추모, 독립운동 관련사료 발간 등이 있다.

이날에 한 해 광복회원과 동반가족 1인은 공공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다음날까지 전국의 고궁, 능원, 독립기념관, 박물관에 무료 입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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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백범 김구 [출처 : 게티이미지 코리아]

김구

 

출생과 독립운동 전

본관은 안동이며, 호 백호, 아명 창암, 본명 창수 였으나 구로 개명, 법명 원종, 초호 연하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수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안악으로 돌아가던 길에 치하포에 머무르다가 일본인 쓰치다가 조선인으로 변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강에 버렸다. 김구는 고향으로 돌아가 머무르고 있다가 해주 감영으로 체포되었다. 그 후 인천으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됐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 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인천에서 항만 건설 공사 노역을 하였으며, 감형으로 1915년 출옥하여 김흥량의 동산평 농장 농감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 이름이나 자 외에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
아명 : 아이 때의 이름
범명 : 출가하여 절에서 행자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주는 이름
초호 : 가장 먼저 나온 호, 가장 큰 활자

 

상하이 임시정부 활동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 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애국단 조직과 이봉창, 윤봉길 의거 성공

1931년 한인 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흥일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8윤봉길 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임시정부 국무령 재임, 국무위원회 주석 취임

1933년 장개석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중국 후난성 창사로 임시정부를 옮긴 뒤인 1938년 5월7일 남목청(난무팅)에서 당 통합 문제를 논의하던 중 백범 김구는 피격된다. 시내 상하의원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의 모습. [출처 : 태학사]

대일선전포고

같은해 충칭에서 한복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정식 협정 체결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 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운동장전에 나설 수 있었다.

 

주석으로 재선,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 설치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 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을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 시안과 안후이성 푸양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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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부총재 취임,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유골 봉안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 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활동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거절함으로썩,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승만과 김구

5.10제헌국회의원선거 거부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남북협상 4자회담 실패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민족통일운동 전개 중 암살 당하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이후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으며, 4.19혁명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를 남겼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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