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 내용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날짜
매년 4월 19일이다.
의의/목적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을 기념하는 법정기념일이다.
역사/유래
4.19혁명 명칭 변화
4.19혁명은 평가와 의미 부여에 따라 [혁명]에서 [의거]로, 다시 [혁명]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박정희 정권 이후 4.19혁명의 의미 점자 축소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에 4.19혁명 기념식은 국가 차원에서 개최되었으나, 박정희 군사정권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그 의미가 점차 축소되었다.
법정기념일로 지정되다.
1973년 3월 30일 [4.19의거기념일]은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으로 인해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고, 1994년 [4.19혁명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의의가 격상되었다.
TMI 기념일 행사 역사
4.19혁명 기념일 행사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국립 4.19묘지에서 이루어지는 기념식, 사건이 크게 발생한 지역에서 개최되는 기념식, 그리고 학생 및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로 구분된다. 국가보훈처는 2004년 제44주년 기념행사 계획에서 기념식을 개최하는 목적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불의에 항거한 4.19혁명 정신을 기리고 자유/민주/정의의 4.19 민주이념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함"이라고 하였다.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기념식에는 3브 및 헌법기관의 장, 정당대표, 국가보훈처장, 행정자치부장관, 서울특별시장, 4.19 및 보훈단체장, 민주화운동 관련단체장이 주요 인사로 참석하고, 이 밖에 4.19 관련단체 회원, 학생, 공무원, 시민들이 참석하고 있다.
식순은 개식, 국민의례, 헌화, 4.19혁명 경과보고, 기념공연, 추모 헌시 낭송, 기념사, 기념노래 제창, 폐식으로 진행된다.
지역행사는 주로 4.19혁명 관련 기념시설물이 있는 장소에서 각 자치단체 및 관련단체 주관으로 개최한다.
기타 기념행사는 4.19혁명 관련단체들의 주관으로 이루어지는데, 추모제, 추모음악회, 사진 및 자료 전시회, 영상제, 정신계승 마라톤대회, 웅변대회, 백일장으로 10여 개 안팎이다.
학생 및 민중/시민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는 1980년대에 비하면 대폭 축소되었으나, 각각 기념식을 갖은 후 학술행사, 마라톤대회, 문화행사로 진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기념행사는 사회 현안을 쟁점으로 부각시키는 사회운동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4.19혁명
이야기
4.19혁명이 일어난 계기
대한믹국 초대 정부인 이승만 정부는 계속되는 독재 정치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 갔다. 이 때문에 1960년 3월 15일에 시행될 정/부통령 선거에서 패할 것이 우려되자 경찰과 행정 기관을 시켜 대규모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마산 시위, 폭력으로 진압하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는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는 최루탄과 총을 발사하며 폭력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그러나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는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났고,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4.19 혁명 불씨
그러던 중 4월 11일에 마산 시위 때 행방불명되엇던 마산 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바다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의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시위도 한층 거세졌다.
본격적인 4.19 혁명
4월 19일에는 서울과 부산 등 전국 곳곳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날 시위는 부정 선거 이후 최대 규모로 발전했는데, 경찰이 총을 쏘아 115명이 죽고 727명이 부상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분노한 국민들의 시위를 막으려고 했지만, 계엄군조차 섣불리 진압에 나서지 않아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승만 정부 꼬리 자르기 하였으나, 멈추지 않는 시위
이승만 정부는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을 물러나게 해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계속 대통령인 이승만이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4월 25일의 시위에서는 대학 교수들도 "학생들의 피의 대가에 보답하라"며 참여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그칠 줄 모르자, 미국도 더 이상 이승만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다.
4.19 혁명 결과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나겠다는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이로써 12년에 걸친 제1공화국도 끝이 났다.
4.19 혁명 연표 | |
발생시기 | 주요 사건 |
1954년 11월 | 이승만 사사오입개헌 단행. |
1958년 12월 | 자유당의 [2.4보안법파동]발생 |
1960년 2월 28일 | 민주당 정부통령후보의 대구 유세일(일요일)에 대구시내 초/중/고교 학생이 당국의 지시로 등교를 강요 당하자 시위를 벌임 |
1960년 3월 1일 | 서울/대전/수원에서 학생 시위 발생 |
1960년 3월 8일 | 대전에서 학생 시위 발생 |
1960년 3월 12 ~ 13일 | 부산/서울에서 학생 시위 발생 |
1960년 3월 15일 | 정/부통령선거 실시. 마산에서 학생 시위 발생 |
1960년 3월 17일 | 이승만/이기붕(정/부통령) 후보 당선 |
1960년 4월 11일 | 시위 중 행방불명 되었던 김주열 학생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서 시체로 발견 |
1960년 4월 18일 | 의사당 앞에서 연좌 시위를 한 후 귀교하던 고려대생들이 습격을 받아 10여명의 부상자 발생. |
1960년 4월 19일 |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각 대학에서 총궐기 선언문 낭독 후 중앙청을 향해 행진. 서울 시내가 무정부상태가 되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 진주시킴. |
1960년 4월 23일 | 서울시가 4.19희생자 합동위령제를 주관하자 학생들 일제히 반발. 부통령 장면 사퇴, 당선인 이기붕 사퇴 의사 발표. |
1960년 4월 25일 | 서울 각 대학 교수 259명 [시국선언문] 발표 및 시위. |
1960년 4월 26일 | 4월 19일과 같은 대규모 시위 발생. |
1960년 4월 27일 | 이승만이 국회에 [대통령사임서] 제출 |
1960년 4월 28일 | 이기붕 일가가 경무대에서 시체로 발견, 자살로 추정 됨. |
1960년 5월 29일 | 이승만 하와이로 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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