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 내용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날짜
매년 4월 첫째 금요일이다.
의의/목적
향토예비군이 창설된 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날이며 국민적 안보의식과 지역단위 방위체제를 확립하고 향토예비군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TMI 향토예비군이란?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향토방위와 병참선의 경비 및 후방 지역 피해통제 임무와 유사시에 국토방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편성된 비정규군이다.
이들은 군복무를 마친 자들로 평소에는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며 정식 군인인 정규군을 보충하고 나라와 향토의 방위를 위해 예비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비정규군, 향군 또는 예비군이라고 부른다.
역사/유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예비군 창설 언급
1968년 2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은 경남 하동에서 열린 경전선 개통식 연설에서 향토예비군 창설의지를 밝히며 250만 향토예비군의 무장화를 역설했다.
예비군 조직과 편성 완료
1968년 2월 18일 향토예비군 조직을 위한 법령제정에 착수하여 3월 31일 예비군 편성과 조직을 완료하였다.
향토예비군의 시초
1968년 북한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무장공비를 침투시킨 1.21사태와 1월 23일 동해에서 발생한 미국의 첩보함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을 계기로 국민의 반공의식을 고취시키고 북한의 4개 군사노선에 대응하기 위해 1968년 4월 1일 창성되었고,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창설식이 거행됨으로써 향토예비군이 공식적으로 조직되었으며, 5월 29일 [향토예비군설치법이 공포되면서 체계가 완성되었다.
TMI 향토예비군설치법 제1조 목적에 따른 향토예비군의 임무
1. 전시/사변, 기타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아래에서의 현역 군부대의 펴성이나 작전 수요를 위한 동원에 대비
2. 적 또는 반국가단체의 지령을 받고 무기를 소지한 자(무장 공비)의 침투가 있거나 그 우려가 있는 지역 안에서의 적 또는 무장공비의 소멸
3. 무장소요가 있거나 그 우려가 있는 지역 안에서 무장소요 진압(경찰력만으로 그 소요를 진압/대처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함)
4. 위의 2와 3지역 안에서 있는 중요시설/무기고 및 병참선 등의 경비
5. 민방위기본법의 의한 민방위 입무의 지원 등이다.
첫 기념식
1969년 향토예비군 창설 제1주년 기념식을 사단별로 실시하였다.
향토예비군의 날 시초 (국가기념일 지정)
1970년 2월에는 4월 첫째 토요일을 [향토예비군의 날에 관한 규정]과 대통령으로 향토예비군의 날로 지정했다.
기념일 날짜 변경
이후 2006년 9월 6일 시행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4월 첫째 금요일로 변경되었다.
TMI 기념일 행사
향토예비군의 날에는 국방부 주관으로 모든 예비군이 참가하여 향토방위의 임무를 새롭게 다짐하는 행사를 거행한다. 이날 각 지방단체와 기관에서는 최우수 향토사단으로 선발된 부대를 표창하며, 그 밖에 예비군 발전과 향토방위에 이바지한 부대 및 유공자들에게도 예비군 포장,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국방부장관 표창을 수여하여 예비군 및 관계자를 격려하는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TMI 기념일 이벤트
또 국방부에서 전국에서 선발된 모범예비군들을 초청해 국립현충원 참배, 오찬, 유명 관광지 관광 등 격려 행사를 실시하고, 이 날 하룻동안 모든 예비군에게는 고궁/국립박물관/미술관/국악원예악당 등의 무료 입장권이 주어지며, 국립중앙극장은 50% 관람료를, 전국 영화관은 20%의 관람료를 할인하는 등 문화공간 이용 혜택이 부여된다.
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1.21 사태(김신조 사건)
[참고 자료] 나무위키
간단 설명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부대)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로부터 300m 떨어져있는 종로구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였던 사건.
사건 결과
총 침투한 31명 중 사살 29명, 미확인 1명, 투항 1명(김신조 소위)의 전과를 올렸다.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이 사건을 일명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북측 박정희 암살 계획
북한에서 최초로 세운 작전은 세 자리 숫자의 병력을 침투시켜서 본대는 청와대를 기습해서 박정희를 암살하고 나머지는 각 조별로 미 대사관 공격 및 요인 암살, 국방부 굥격 및 요인 암살, 교도소 공격 후 죄수 석방 등 서울 시내에 총체적인 대혼란을 유도하고 석방시킨 죄수와 공격조가 동반 월북 후에 삐라를 뿌려서 남조선 내 반정부 세력의 의거로 꾸민다는 대규머 계획.
즉, 9일 뒤인 1월 30일에 베트남에서 일어난 테트 대공세와 같은 작전을 노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작전을 축소해 30여 명을 침투시켜서 청와대를 습격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이 난 것이다. 침투/습격/탈출조 등 3개조로 나누어 침투조가 청와대 보초를 제거하고 경계를 펴는 동안 습격조는 청와대 내부를 공격하고 철수하면 탈주조는 청와대 경내의 차량을 탈튀해 시동을 걸어 놓고 있다가 임무를 마친 동료를 싣고 문산 쪽으로 도주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을 고작 3~4분 만에 끝낼 계획이었다고 한다.
사건이 벌어진 이유
그 당시 상황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인해 한, 미, 일 동맹체제가 구축되었고 북한은 고립되는 형국이었다.
북한 명분
베트남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가운데 파병된 한국군의 전투력에 고전하던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북베트남의 호찌민이 김일성에게도 파병 요청했지만 앞서 언급한 상황 때문에 김일성은 거절했고 남한이 더 이상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파병하지 못하게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에 따라 1968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김일성이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한국을 향한 강도 높은 안보도발을 시작했고 그 시작으로 청와대 침투 계획, 즉 1.21사태를 주도했다.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참고 자료] 위키백과
간단 설명
1968년 1월 23일 미 해군 소속 정찰함 USS 푸에블로호가 동해 공해상에서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되어 83명의 미 해군 승무원들이 11개월이나 붙잡혀 있다가 풀려난 사건이다.
이사건은 미 해군 역사상 외국군대에게 자국의 군함이 피납당한 첫 번째 사례이며, 푸에블로호는 여전히 나포 상태에 있는 유일한 미 해군 선박이다. 나포된 줄곧 원산항에 계류되어 있던 푸에블로호는 1998년 경 대동강변으로 옮겨진후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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