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목적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의 전쟁
역사/유래
한국전쟁 일어나기 전 상황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TMI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부터 1945년까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전쟁이다.
자세한 내용
제2차 세계대전은 흔히 1939년 9월 1일에 일어난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대독 선전포고에서 발발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종결된 것으로 여긴다. 이 기간 동안 1941년 독일의 소련 공격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 등의 과정을 거쳐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었다.
전쟁은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3국 조약을 근간으로 한 추축국 진영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진영의 대립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전쟁의 경과에 따라 각 진영에 가담한 국가들은 변동이 있으며, 중립을 표방한 나라들 가운데에서도 실제로는 어느 한 진영에 적극 가담한 나라도 있다.
이 전쟁으로 세계에서 수천만에 이르는 인명 피해가 나타났으며,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도 커다란 변동이 나타났다.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을 중심으로 1945년 10월 24일 국제연합이 창설되었으며, 전후 경제 질서의 회복을 위해 1944년 체결된 [브레튼우즈 협정]으로 달러가 세계의 기축 통화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미국 중심의 경제체제가 성립하였다.
소련 군대가 주둔한 동유럽, 외몽고, 북한 등에 공산주의정권이 들었고, 중국에서도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세계는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동유럽,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으로 재편되었다.
또한 1960년대까지 패전국의 지배 아래 식민지 상태에 있던 나라들도 상당수가 주권국가로 독립을 이루면서 국제 관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TMI 카이로 회담
제2차 세계대전 때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개최된 회담. 1차는 1943년 11월 22일에서 26일까지, 2차는 1943년 12월 2일에서 7일까지 열렸다.
첫 회담
1943년 11월 22일 ~ 26일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의 세 연합국 수뇌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세계전쟁에 대한 대응 문제로 모임을 가진 것이다.
당시 가장 중요한 핵심 사안으로는 대일전에 서로 협력할 것을 협의하였고, 일본이 패전했을 경우를 가정하고 일본의 영토 처리에 대하여 연합국의 기본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방침은 [카이로 선언]으로서 발표되었다. 군사 문제에 있어서는 처칠과 루즈벨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서 숙의하였고, 장제스와 함께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탈환한다고 합의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장제스 총동이 미국/영국/중화민국 3개국군에 의한 미얀마에서의 신작전을 펴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처칠 수상은 영국군 상륙용 선박은 앤다만 제도에 파견하는 것에 반대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또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북부 프랑스에 대한 반격을 절대적으로 우선하려 하였던 것에 반하여, 영국 처칠 수상은 이탈리아와 동부 지중해에도 병력의 4할을 투입하자고 제안하여, 서로 의견이 달라 이 역시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결국 주로 일본에 대응하는 문제에 대해서 합의하였고, 특히 한국 독립문제가 처음 언급된 회담으로 특징된다.
두 번째 회담
1943년 12월 2일 ~ 7일에 열렸다. 1차 회담 이후 테헤란에서 러시아 요시프 스탈린과 프랭클린 루즈벨트, 처칠이 회담을 가졌다.
테헤란 회담을 마치고 귀로에 다시 카이로에서 루즈벨트와 처칠은 튀르키예의 I. 이노뉴 대통령을 초철하여 회담을 갖고, 튀르키예를 연합국측에 가담시키려고 설득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최고사령관으로 결정했음을 처칠에게 알렸다.
북한으로 진군한 소련군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 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TMI 관동군
일본의 중국침략 첨병으로 제2차 세계대전 말까지 만주에 주둔했던 일본 육군부대의 총칭
자세한 내용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러시아와 맺은 포츠머스조약에서 군 주둔권을 승인받고, 러시아의 조차지인 랴오둥반도를 인수하여 관동주를 만들고 관동도독부를 두었다.
관동주와 남만주 철도의 경비를 위해 병력을 주둔시킨 것이 관동군의 시초이다.
1919년 도독부가 폐지되고 그 밑에 있던 육군부가 독립하여 일본왕 직속의 관동군사령부가 되었다. 뤼순에 관동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일본 본토에서 교대로 파견되는 1개 사단/만주독립수비대/뤼순요새사령부/관동헌병대를 그 아래에 두었다.
관동군은 랴오둥 반도 및 철도 연변을 지키게 되었고 일본의 대륙진출의 교두보로서 전략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일본왕의 직속이 된 관동군사령부는 중국을 침략하고, 소련을 가상 적국으로 하는 일본의 국방방침에서 전위부대가 되어 있었다.
1928년 장쭤린의 폭살사건을 일으키고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만주국의 건설을 주도했다. 1931년에 사령부를 펑톈으로 옮겼고 또 이듬해 신징으로 옮기고 관동군사령관이 주만 특명전권대사/관동장관을 경하여 군/정의 실권을 장악, 실질적으로 만주를 지배하였다.
관동군의 병력도 대륙침략정책의 확대와 대 중국전/대 소전에 대비하여 계속 증강되어 1933년 10만명이었던 병력이 1941년에는 70만 명으로 늘어났다.
관동군은 소련에 대해서 장고봉사건, 노몬한 사건 등 군사도발을 계속했고, 독소개전 때에는 관동군 특별연습을 행하여 군사적 위협을 가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동북지방의 중국과 한국인의 항일무장세력의 암살에도 열중했다.
사라진 관동군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세가 악화되자 대소방침을 전환, 이른바 [북방정밀책]을 취함으로써 관동군의 주력을 일본 본토 및 남방으로 이동시켜 세력이 약화되었다.
1945년 8월 9일 대일 선전포고를 한 소련군의 참전으로 급속히 붕괴되었으며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의 무조건 항복으로 없어졌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전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TMI 미소공동위원회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합의에 의하여 설치된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미/소 양국 대표자 회의
자세한 내용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의 독립정부 수립과정으로 임시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설립된 공동위원회이다.
1946년 1월 16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문제 해결을 위하여 예비회담을 열었고, 1946년 3월 20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제3조 2항과 3항의 조항에 따라 제1차 회의를 열었다.
미국측 대표로는 소장 A.V.아놀드, 소련측 대표로는 중상 T.E.스티코프이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는 벽두부터 난관에 부닥뜨리게 되었는데 가장 큰 논란은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민주주의 제정당에 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이때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는 5년 동안의 신탁통치가 과도기 정치로서 요구되었으나 남한의 우익정당과 사회단체는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다.
이에 소련측 대표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의를 반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는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반면에 미국측 대표는 의사표시의 자유원칙에 입각하여 모스크바삼상회의 신탁통치안을 반대한다고 해서 임시정부수립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와 같은 의견대립으로 1946년 5월 1일 공동성명 제7호까지 발표하였으나 아무런 결실 없이 5월 6일부터 휴회에 들어갔다.
그 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7월 신탁통치 반대투쟁 단체를 둘러싼 논란과 미국측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결국 결렬되었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TMI 신탁통치
국제연합 감독하에 시정국(신탁통치를 행하는 국가)이 일정지역(신탁통치지역)에 대하여 실시하는 특수통치제도.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유엔총회 결과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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