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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내용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날짜
매년 5월 5일이다.
의의/목적
모든 어린이가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닌 민주시민으로서 바르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는 것을 고취하기 위해 만든 기념일이다.
TMI 기념일 행사
정부와 어린이 관련단체 주관으로 어린이날 기념식이 열리는데, 어린이 헌장을 낭독하거나 모범어린이를 선발하고, 아동복지사업 유공자를 시상하는 행사가 펼쳐진다. 또한 청와대 기념행사에는 낙도나 오지의 어린이, 소년소녀 가장, 시설보호 어린이 같은 어려운 환경의 어린이를 초청하여 위안하는 절차가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도 기념잔치, 체육대회, 글짓기대회, 미술대회 같이 어린이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행사가 벌어진다. 그리고 어린이는 각종 놀이시설, 공원, 체육관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점차 어린이날 행사가 상업화되어 백화점의 어린이용품 판매 증대를 위한 중요 이벤트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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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래
어린이날이 만들어진 배경
방정환이 어린이의 고유 문화와 예술 활동을 진작시키며, 어린이의 인권의식을 기를 목적으로 1922년 3월 16일 동경에서 색동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23년 어린이날 선언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TMI 사실 색동회 조직 전 이미 어린이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미 3.1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는 소년들의 민족의식을 배경으로 1921년에 결성된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22년에는 이와 함께 불교소년회와 조선소년군이 모여 [조선소년운동협회]를 만들고 기념행사를 열기 시작했다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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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시초
1923년 5월 1일 발표된 어린이날 선언문을 발표를 하였다.
TMI 어린이날 선언문 내용
"어린이를 종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완전한 인격적 대우를 허용하고,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연소노동을 금지하며, 어린이가 배우고 즐겁게 놀 수 있는 가정과 사회시설을 보장할 것"과 같은 아동존중사상이 드러나 있다.
TMI 5월 1일로 정한 이유는?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것은 [천도교소년회]의 창립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이날 일제강점기로 인해 탄압되다.
일제강점기에 어린이날 행사와 어린이(소년)운동은 무산아동의 해방론과 같은 계급적 항일적 성격의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행사가 금지되는 등 탄압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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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운동단체의 내분이 겹쳐 1920년대 말에는 어린이운동이 약화되었다.
TMI 일본에게 어린이날을 뺏기다.
1931년부터는 일본측의 [유아애호주간]으로 어린이날 행사의 주도권이 넘어감과 동시에 어린이의 권리 차원이 아닌 육체적 건강을 강조하였다.
총독부의 조선사회사업회가 주관하는 유아애호주간 행사는 어린이의 건강검진, 영양강습회 같은 계몽사업을 전개하였으며, 날짜는 꼭 5월 5일로 정해져 있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그 즈음 일주일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광복 후 어린이날 날짜 변경
1945년 광복 이후는 다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했으며, 1957년에는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이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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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기념일, 공휴일 지정
1961년 제정된 아동복지법에서는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명시하였고, 1970년[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공휴일로 지정된 이래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TMI 어린이 헌장
어린이 헌장은 1988년 민주시민으로서의 지향을 담은 내용으로 개정되었으나, 따뜻한 가정에서 자랄 권리를 비롯하여 건강에 대한 권리, 즐겁게 놀 수 있는 권리 같은 기본가치는 1923년 어린이날 선언문의 아동존중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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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방정환
일대기 | |
연도 | 내용 |
1899년 | 11월 9일(음력 10월 7일) 성루 야주개(지금의 당주동) 장경수와 손성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던 그의 집안은 야주개에서 나름 큰 상인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병약하여 늘 누워 지내고 있었지만, 가정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
TMI 방정환 집안이 부자인 근거 방정환 집안의 성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그가 태어났을 무렵 그의 집안은 "장사를 크게 하였고 대단히 큰 기와집을 하나 가지고는 부족하여서 두 집을 사서 사이를 트고 한 집을 만들어 쓰고 있었다"는 그의 술회를 통해서 알수 있듯이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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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 1905년 | 5세부터 7세까지 한문에 조예가 깊었던 할아버지의 지도로 천자문을 배웠다. 7세 소년 시절 방정환은 삼촌이 다니던 보성소학교에 따라갔다가 우연히 김중환 교장의 눈에 띄어 전교생 중 가장 어린 나이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했다. 당시 신식학교인 보성소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머리카락을 완전히 밀어야 했다. 머리를 깎고 입학하는 것을 조부는 반대했지만, 가족들은 그의 뜻을 따라줬다. |
TMI 보성소학교 한말 친러파의 거두이자 고종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내장원경 이용익이 1905년에 세운 사립학교다. 한미한 출신이었던 이용익은 보부상으로 또 금광꾼으로 변신하며 재력을 쌓았고, 세도가로 출세한 인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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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 그의 집안은 갑작스럽게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 이후 명성황후의 시해와, 아관파천 등 국내외 정세는 늘 불안정했고, 왕실을 상대로 사업을 했던 그의 집안은 거듭되는 부친의 사업실패와 함께 하루아침에 내리막으로 치달았다. 이후 방정환은 배고픔과 싸우며 견디기 힘든 시기를 보냈다. |
1908년 | 10세가 되던 해 총명한 그의 재질을 눈여겨보던 어느 미술가가 그에게 환등기 한 대를 선물했다. 그때부터 방정환은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환등기를 비춰 보이면서 무성 영화의 변사 흉내를 내며 놀았다. 방정환은 이 신기하고 재밌는 놀잇거리를 통해 연극과 활동사진 제작에 대한 감을 익혔다. 방정환에게 환등기는 어린 시절에 당했던 불행과 슬픔에서 그를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었던 치유제였고, 환등기에서 나오는 빛은 낯설지만 새롭고 신기한 세계를 경험하게 해 주는 마술 같은 불빛이었다. 이 때 방정환은 대한문 맞은 편에 있던 친구 집에서 어린이 토론 연설 모임인 [소년입지회] 활동을 했다. 방정환이 천도교와 연관을 맺게 된것은 사업 실패를 거듭한 부친이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천도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친의 영향으로 천도교인이 된 방정환은 소년 입지회에서 동화구연과 토론회 등을 하며 정신세계를 가다듬어 나갔다. |
TMI 소년입지회 소년입지회는 독립운동가이자 천도교 핵심인물이었던 권병덕(1867~1944)이 조직한 모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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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 1914년 | 사직동에 위치한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3월에 미동보통학교(집안의 이사로 전학함)를 졸업하였다. 보통학교 졸업 후 상업 공부를 하여 가문 전통을 이어 가기를 원했던 부친의 뜻을 따라 선린상고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환등기를 가지고 놀며 열띤 토론을 하던 문학 소년에게 상업학교가 적성에 맞을 리 없었다. 결국, 졸업을 1년 앞두고 조선은행 서기로 취직시켜 주겠다는 선생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교를 중퇴하였다. |
1915년 | 17세에 장남으로서 집안 평편에 보탬을 주고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류를 필사하는 사자생 생활을 하며 독학하였다. 앞날이 안 보이는 하루하루였지만, 꿈을 잃지는 않았다. 훗날 방정환은 재능있는 청년들이 생계를 위해 자신의 꿈과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을 항상 안타깝게 여긴 것도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회한이었다. |
1917년 | 방정환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은 1917년에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1862~1922)의 딸과 결혼하면서부터이다. 방정환은 손병희를 알게 된 것은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병덕에 의해서였다. 소년입지회 활동을 시작으로 어린 방정환을 평소 눈여겨보던 권병덕은 그를 의암 손병희에게 소개했다. 그 후 방정환은 토지조사국 사자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가난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후 유광렬, 이중각 등과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하였다. |
1918년 | 12월 봉래동 소의소학교에서 개최된 [경성청년구락부]의 송년회에서 방정환은 첫 자작 각복인 소인극 [동원령]을 연출하고 주연을 맡았다. 어린시절 연극과 영화, 서양문물을 접하면서 영향을 받았던 어린 방정환이 어느덧 성장하여 직접 극본을 쓰고 소인극 활동을 한 것이다. 그는 어린시절 꿈을 한 걸음씩 이뤄 나갔다. 천도교의 정신적/물리적/조직적 뒷받침을 받으면서 청년 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수많은 순회강연을 통해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섰고, 남달리 문예에 관심이 많아 소설과 수필, 시 등을 발표하였다. |
1919년 | 1919년에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경성청년구라부는 민족운동에 뜻을 둔 18, 19세의 소년들로 이루어진 비밀클럽이었다. 이후로 방정환은 [북극성]이라는 필명으로 번역가 생활을 했고 습작을 하며 자신의 재능과 꿈을 키워나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방정환은 3월 1일 자를 마지막으로 못 나오게 된 [조선독립신문]을 오일철과 함께 집에서 등사판으로 박아 배부하고, 독립선언서를 돌리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그해 12월 최초의 영화 잡지 [녹성]을 발행하였다. |
1920년 | [신청년]과 [녹성] 발간 경험을 토대로 방정환은 [신여자]의 편집 고문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시기의 활동은 그가 1920년대에 본격적인 언론/출판인으로서의 활동을 펴나가는 데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920년 당시 방정환은 천도교에서 발행한 종합잡지인 [개벽]의 도쿄 특파원으로 임명받았고, 천도교청년회 도쿄지회 창립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도요대학 철학과에 특별청강생으로 다니며, 철학과 아동문학, 아동심리학과 문화학 등을 공부했다. |
1921년 | 귀국한 뒤 방정환은 1921년 11월 10일 천도교 청년회 도쿄지회장으로서 청년을 선동하여 저항운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종로구치소에 구속되었다. 며칠 만에 풀려나자 다시 일본으로 떠나 세계 명장 10편을 번역하여 번압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출간했다. |
1923년 | 이때 방정환에게 특별한 해였다. 이시기를 기점으로 그가 본격적인 아동문학과 문화운동을 전면에서 전개했다. 1923년 3월 16일 도쿄 하숙집에서 어린이 운동단체인 [색동회] 창립을 위한 모임을 가졌고, 도쿄에서 편집한 국내 최초의 어린이 잡지 [어린이]를 개벽사에서 3월 20일 창간하였다. 색동회는 3월 30일 창립되었고, 5월 1일 서울 시내 소년단체들의 연합조직인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로 [어린이날]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1922년 5월 1일을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날로 제정할 것이 선창 되었고, 1923년 5월 1일 색동회 발대식과 함께 어린이날 기념식이 최초로 열렸다. |
TMI 어린이날은 이후 천도교 중심의 민족주의 소년운동과 오월회 중심의 무산소년운동으로 통합되고 분열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 |
1928년 | 5월 1일이었던 어린이날의 날짜가 변경된 것은 1928년이다.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메이데이 날과 공교롭게 겹치자 이를 피하기 위해 해마다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하여 행사를 진행했다. |
1931년 | 방정환은 어린이날과 함께 국내 최초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만든 방정환은 언론이자 출판인, 운동가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가중된 탄압과 재정난,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이 가져온 스트레스로 쓰러졌다. 1931년 7월 17일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7월 23일에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타계 직전까지도 동화집필과 구연동화에 몰두했던 어린이들의 대부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
TMI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이 국민들에게 주목받게 된 것은 1960년대 들어와서이다. 이때부터 어린이날은 누가 만들었고, 왜 만들었는지, 그리고 방정환이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고 [어린이]를 창간했으며, 어린이를 위해 한국 최초의 동화집을 펴내고 어린이날을 만들어 준 분으로서 칭송받기 시작했다. |
TMI 소파 방정환의 소파의 의미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일본의 아동문학자인 이와야 시자나미의 호를 본떠서 지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운동을 전개한 김기전의 호인 [소춘]과 연관지어 천도교 사상을 담아낸 것으로 해석한 설이다.
어느 날 방정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내에게 김기전과 함께 호를 지었다고 말하면서, 김기전은 소춘으로 자신은 작은 물결이라는 뜻인 소파라고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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