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 내용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날짜
매년 4월 28일이다.
TMI 음력 3월 8일 기준으로 할 경우 매년 기념일이 달라지기 때문에 양력으로 환산하여 정하였으며,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기념일로 지정되어 있다.
의의/목적
1545년 4월 28일 태어난 충무공 이순신의 탄신을 기념해서 충무공의 애국과 충의를 전승하고 민족자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제정한 날.
역사/유래
기념일 시초 (조선시대)
이순신을 기리는 행사는 그가 죽은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선조는 삼군수군통제사영이 있는 통영에 사당을 세워 그를 제사하도록 했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최고의 예우였다.
TMI 이처럼 신위를 사당에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받들던 날과 오늘날의 기념일과는 그 위상과 의미가 조금 다르지만, 그에 버금가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 뒤에도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은 효종 때 남해도의 노량에, 숙종 때 지역 유생의 요청으로 그의 고향이자 묘가 있는 아산에도 세워졌다. 통영과 노량의 사당에는 [충렬]이란는 액호가 내려져 충렬사로 불렸고, 아산 사당의 호칭은 현충사로 정해져 역시 편액이 하사되었다. 아울러 숙종 때 고인이 된 신하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호칭인 선정으로 불리면서 최고의 지위로 격상되었다.
TMI 이어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 세워진 관우의 사당인 관왕묘에 조선 장수의 대표로서 배향되기도 하였다.
충렬 : 충성스러운 열사
편액 :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붙여서 건물에 관련된 사항을 알려 주는 것.
정조는 이순신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추증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충무공전서]를 편찬/간행함으로써 그를 기리는 수준이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을사조약,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현충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 철폐되었다가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이에 대한 반발로 을사조약 직후인 1906년 아산의 유생들이 현충사 옛터에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5월에는 [동아일보]의 주도로 결성된 충무공유적보존회가 성금을 모아 1932년 사당을 짓고 이순신의 영정을 모셨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충무공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매년 4월 28일 탄신제전을 올렸는데, 한국전쟁 후 당시 자유당의 실력자 이기붕이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국방부장관과 3군 참모총장이 이사로 참여할 정도로 이순신 기념사업이 더욱 활발해졌다.
본격적인 기념일 행사
일제강점기와 8.15광복 후에도 간간이 이루어졌으나 본격적인 기념일로서 행사를 치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면서부터이다.
TMI 특히 박정희는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충무공을 구국의 영웅이자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삼아 충무공 탄신일 행사를 적극 추진하는 한편, 1968년 서울 광화문에 충무공 동상을 세우고,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는 등 충무공 현양 및 추모사업에 적극적이었다.
충무공 탄신일 법정기념일 제정
1967년 1월 16일에는 문교부정 제179호로서 4월 28일을 충무공탄신기념일로 제정,공포하였다. 이어 1973년 3월 30일에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기념일로 지정되는 등 충무공 현양 및 추모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TMI 군사정권과 충무공
군사정권은 이순신의 멸사봉공과 자기희생 정신을 국민의 정신을 계도하는 핵심으로 삼는다는 방침 아래 각 학교에 충무공의 정신이 담긴 멸사봉공과 자기희생 정신을 국민의 정신을 계도하는 핵심으로 삼는다는 방침 아래 각 학교에 충무공의 정신이 담긴 표어를 붙이고 기념 웅변 대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박정희는 충무공 탄신일에는 아산 현충사를 방문해 추모하고 경내의 활터에서 활을 쏘는 등 자신과 이순신을 동일한 이미지로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기념일 행사 다시 재개
1990년대 들어 국가 정책적 측면의 소홀과 충무공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저하로 행사 규모가 작아지기 시작해, 기념일의 성격만 유지해 오다가 1998년 충무공 순국 400돌을 맞으면서 다시 기념사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TMI 기념일 행사
기념일 행사는 국방부가 주관하지만, 주요행사는 해군을 주축으로 이루어진다. 해군은 행사 당일 기항 중인 함정마다 만항식을 거행해 성웅의 탄생을 경축하는 한편, 부대별로 충무공 유적지 참배, 부대 개방 행사, 초빙강연, 마라톤이나 행군 등을 실시하고, 해군본부 장성 및 주요 참모들은 아산 현충사 참배를 통해 충무공의 우국충절을 기린다.
또 한강시민공원 이촌지구 거북선나루터에서는 국궁/투호 같은 민속돌이를 비롯해 소년 이순신 선발대회 등 각종 경기와 퍼레이드를 통해 시민과 청소년이 함께 하는 탄실일 축제를 벌이고, 그밖에 오페라 공연, 한산도대첩 재현, 학술세미나 개최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이순신
출생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이다. 1545년(인종 1)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 건천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보석군수 등을 지낸 방진의 딸인 상주 방씨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이 밖에 해주 오씨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다.
임진왜란 전 경력
1572년(선조5) 훈련원 별과에 응시 했으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탈락하였다. 그래서 30세가 넘은 1576년(선조 9)에야 식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권지훈련원봉사와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발포수군 만호 등을 거쳐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을 지냈다.
권관 : 조선시대에, 변경의 각 진에 두었던 종구품의 무관 벼슬
만호 : 조선시대에, 각 도의 여러 진에 배치한 종사품의 무관 벼슬
하지만 1583년(선조 16)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친상을 마치고 1586년(선조 19) 사복시 주부로 다시 관직에 나서, 곧바로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녹둔도 의 둔전을 관리하다가 여진족의 습격을 당해 피해를 입으면서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 당시 이순신의 병력 증원 요청을 병사 이일이 무시해서 벌어진 일이었으나, 이순신은 패전의 책임으로 장형을 당한 뒤에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부친상 : 아버지의 상사
둔전 :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토지
장형 : 오형 가운데 죄인의 볼기를 큰 형장으로 치던 형벌, 육십 대부터 백 대까지 다섯 등급이 있었다.
백의종군 : 벼슬이 없는 말단군인으로 전쟁터에 나가 참전하다.
1589년(선조 22) 이산해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서게 된 이순신은 감사 이광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조방장과 선전관 등을 거쳐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한 이순신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임진왜란 해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옥포해전/적진포해전과 진급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와 합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옥포해전), 다음날에도 적진포에서 1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였다.(적진포해전). 이 전투들에서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왜군과의 해전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사천해전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는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해 사천에서 서해로 북상하려던 왜선 13척을 모두 격침시켰다.
당포해전/제1차 당항포해전과 진급
7월 10일(음력 6월 2일)에는 당포에서 왜선 21척을 불태웠으며(당포해전), 7월 13일(음력 6월 5일)에는 왜군이 도주해 진을 치고 있는 당항포를 공격해서 왜선 26척을 격침시켰다(제1차 당항포해전). 이러한 잇따른 승리로 이순신은 정2품 자헌대부가 되었다.
한산도대첩
이순신에게 잇따라 패배한 왜군은 수군의 모든 역량을 전라도로 집결해 맞서려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8월 14일(음력 7월 8일) 견내량에 집결해 있는 왜군을 한산도로 유인해 50여척의 왜선을 격파/나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안골포해전과 진급
안골포에서 지원하러온 왜군을 다시 물리쳤으며, 10월 5일(음력 9월 1일)에는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에서 왜군의 병선 100여척을 파괴했다. 이러한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고, 북상하던 왜군은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정2품 정헌대부가 되었다.
제2차 당항포해전/장문포해전과 진급
이순신은 1593년 8월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으며, 같은해 8월 26일(음력 8월 1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3일(음력 3월 4일) 당항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침시켰고(제2차 당항포해전), 11월 11일을(음력 9월 29일)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의 의병과 합세해 거제도 장문포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했다(장문포해전).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회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호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의 장기화할 것을 대비해 둔전을 일구고 병사들을 조련하였다.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파직되어 백의종군하다.
하지만 당시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과를 놓고서도 논의가 분분했다. 특히 이순신과 원균이 갈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정은 원균을 충청 절도사로 옮겼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대체로 원균의 편에 서서 여러 차례 이순신을 탄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요시라라는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고, 이를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고, 결국 그 책임으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1597년 4월 이순신은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5월 16일(음력 4월 1일)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량대첩과 복직
그러나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8월에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남아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6일(음력 9월 16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명량대첩 이후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을 무산시켜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한양으로 진공하던 왜군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해 충청도 직산에서 진격을 멈추었으며, 그 뒤 전쟁은 남해안 일대의 왜성에서 농성하는 왜군을 조명연합군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노량해전/전사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1598년(선조 31)에도 절이도과 고금도에서 왜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왜군은 그해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를 준비했는데, 이순신은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명나라 제독지린과 연합해 노량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노량해전).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이순신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숨이 끊어졌으며, 조카인 이완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우의정을 추증했다. 이순신은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1등으로 녹훈되었으며, 좌의정이 증직되었고 덕풍부원군으로 봉해졌다.
녹훈되다 : 훈공이 장부나 문서에 기록되다.
증직되다 : 늘어서 많아지다.
봉하다(봉해) : 무덤 위에 흙을 쌓다.
이후 추증
1643년(인조 21)에는 [충무]의 시호를 받았고, 1659년(효종 10)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1707년(숙종 33)에는 충청도 아산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정조 17)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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