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 내용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날짜
매년 4월 21일
의의/목적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모든 국민생활의 과학화를 촉진하기 위해 제정한 날.
역사/유래
과학의 날 시초
한국 최초의 과학의 날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4월 19일로, 과학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 당시 세계 최고의 과학자로 여기던 찰스 로버트 다윈이 죽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제1회 [과학데이]로 삼아 행사를 벌였다.
일제강점기로 인해 기념일 중단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 행사의 지도자인 김용관이 투옥됨으로써 더 이상 행사를 지속하지 못했다.
본격적인 기념일
1967년 4월 21일 과학기술처 발족 날짜를 기념하여 1968년 4월 21일을 제1회 과학의 날로 정했다.
TMI 한국의 과학
1960년대 산업개발을 위해 과학기술에 적극 투자하기 시작한 박정희 대통령 정부에 의해 국가 기념일의 형태로 재현되엇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말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과학원을 설치하여 과학기술 연구 및 교육을 진흥했고, 정부 부처로 과학기술처를 설립하여 국가 과학기술 진흥사업을 총괄하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고취하고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대우를 제고하기 위한 사업도 기획했는데, 과학의 날 제정이 대표적 사례이다.
법정기념일 제정
1973년 3월 30일 대통령령으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제정 및 공포했다.
TMI 기념일 행사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모든 국민생활의 과학화를 촉진하는 데 목적이 있으며, 주관부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지만 행사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주관한다. 중앙행사에는 정부 및 국회 주요인사,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원 등이 참여해 기념식을 열고, 대한민국과학기술상 시상 및 과학기술진흥 유공자에 대한 포상을 한 뒤 부대 행사로 대덕연구단지를 방문한다.
지방에서는 각 학교별로 우수 과학 어린이/교사에 대한 과학기술부장관 표창, 과학실습 및 각종 과학경진대회, 과학 강연회 등을 개최하며, 그 밖에 전국적으로 모형항공기 공작대회, 기계과학 공작대회, 전자과학 실험대회를 비롯해 대학 우수연구센터 개방, 기상관서 및 천문대 개방, 학술 세미나, 올해의 과학기자상 시상식 등 다양한 부대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김용관
간단 설명
요업기술자/과학기술 진흥 및 대중화 운동가이다.
일대기
출생 및 유년시절
호는 장백산 서울 출생. 1897년 3월 21일 서울 창신동에서 유기 도매상 김병수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3년 관립공업전습소 도기과를 졸업한 뒤 경성공업전문학교 요업과에 입학하여 1918년 제1회로 졸업하였다.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가 꿈을 찾다.
졸업하던 해인 1918년 김용관은 조선총독부 장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동경고등공업학교에서 1년간 공부하였다.1년간의 일본 유학은 요업기술자를 꿈꾸는 평범한 청년의 꿈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일본의 근대화가 과학기술의 생활화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잠시 꿈을 접고 직장생활을 하다.
이후 요업기술은 생계를 위한 생업이었을뿐, 그의 눈은 과학의 대중화, 과학 기술의 자급화로 향했다. 1919년 4월에 귀국한 김용관은 처자식이 있었던 탓에 꿈을 접고 부산 조선경질도기주식회사와 총독부 산하 중앙공업시험소에 취직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다.
직장에 적응을 못하고 학원을 차렸지만 망하다.
직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김용관은 몇년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1922년에 직접 조선공예학원이라는 사설 강습소를 차려 운영하였다. 하지만, 이 학원도 자금난과 경험부족으로 7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발명학회를 설립하다.
김용관이 과학대중운동의 뿌리가 되는 발명학회를 설립한 것은 1924년이었다. 김용관은 경성고공과 공업전습소 동기생들, 그리고 물산장려운동 등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발명학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다히 현득영/박길용 등 41명의 창립 발기인을 간신히 모아 발명학회를 발족시켰다. 그가 41명의 발기인을 모을 수 있엇던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과학발명가의 필요성이 증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명학회는 망하다.
발명학회의 야심 찬 발족에도 불구하고 실제 조선인의 과학발명 활동은 매우 부진했다. 결국, 김용관 1인에 의존했던 발명학회는 6개월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발명학회 창립 이후 김용관은 학회의 모든 경비를 자신이 부담하면서 학회 사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사업은 활성화되지 않았다.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후원자도 얻지 못했고 발명에 대한 사회적 인식 또한 기대치를 밑돌았다.
망했던 발명학회를 다시 재건을 시작하다.
김용관이 유명무실하게 사라진 발명학회를 재건하기 시작한 것은 1931년이다. 김용관은 [동아일보]에 민족공업화 진흥 방안과 관련한 글을 닥치는 대로 연재하였다. 이 시기 그가 고민했던 것은 조선인들의 생활이 외국 상품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는 것에 있었다. 조선인이 생활하면 할수록 외국자본만 부유해지고 반면에 조선인들은 가난해지는 현실을 언론을 통해 고발하고자 했다. 그는 일상생활의 필수품을 자체 제작하여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규모 공업을 일으켜 일본 등 외국자본과 경쟁하기는 힘들지만, 소규모 공업을 일으켜 생활용품을 자급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김용관은 1927년에 벽돌공장을 경영하며 과학운동의 자금을 대었다.
재건을 위해선 공업이 필요하다.
김용곤은 물산장려운동이 추구하는 민족의 자립적인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발명의 진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발명을 통해 경쟁력 있는 상품을 생산하느냐 못하느냐가 민족의 흥망이 달렸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가 주장한 발명중심의 자립적 공업화론은 물산장려회의 중심노선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재건을 결의하고 후원자를 영입하다.
1932년 6월 1일 김용관과 박길룡, 현득영 등은 박길룡의 건축사무소에 모여 발명학회를 재건하기로 결의했다. 김용관의 눈물겹고 고집스러운 노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용관은 학회 사무소에 상근하면서 학회의 취지를 각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그 결실이 하나둘씩 맺기 시작했다. 사실 결실이 이루어진 바탕에는 발명학회가 처음 생겼던 1920년대와 달리 1930년대의 사회적 여건이나 시대상황이 많이 변화된 탓도 있었다. 이후 사회적 영향력이 있었던 변호사 이인을 후원자로 영입하면서 발명학회는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발명학회 자립하다.
김용관, 박길룡, 현득영, 이인 등 주도자들은 물산장려회의 틀을 벗어난 독자적인 발명진흥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고, 이듬해 학회 기관지이자 우리나라 쵳초의 과학잡지인 [과학조선]을 창간하며 새로운 과학문화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6월 창간호를 시작으로 1년간 발간됐던 [과학조선]은 1934년 윤치호를 의장으로 조직한 과학지식보급회에 인계되어 1944년까지 발행되었다.
드디어 과학을 알릴 기회가 오다.
1930년대 들어와 재건된 발명학회의 활동은 일종의 과학계몽운동이자 과학 문맹 퇴치운동이었다. 발명학회를 재건하고 [과학조선]을 창간하는 데 성공한 김용관은 발명학회의 사사을 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한 대중집회를 구상하였다. 마침내 그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 온 것이었다.
한국 최초의 [과학의 날] 행사
1934년 2월 28일 오후 5시 반. 이인의 사회로 서울 종로 YMCA 회관에서 과학데이 행사를 논의하기 위한 모임이 개최되었고 여기서 행사를 추진할 37명의 실행위원이 선출되었다. 실행위원회는 제1차 회의를 통해 전국적인 과학 행사를 당시 일반인들에게 진화론으로 널리 알려진 찰스 다윈 서거 50주년 기념일인 4월 19일에 갖기로 결정하였다. 한국 최초의 [과학의 날]이 탄생한 것이다.
과학데이 문화가 생긴 이유
4월 19일 이라는 다윈과 관련된 날짜에 과학행사를 하게 된 것은 1920년대부터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사회진화론의 영향이 컸다. 진화론의 [적자생존론]을 바탕으로 조선이 식민지가 된 이유는 힘이 약해서이고, 승자가 되려면 힘을 길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과학이 으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1회 과학데이 대성공하다.
1934년 제1회 과학데이 행사는 계획 단계부터 주목을 받았고, 기업, 사회 명사들로부터 후원금이 이어지는 등 사회의 높은 호응을 받았다. 제1회 과학데이 행사를 띄우기 위해 김용관은 4월 16일부터 3일간 매일 오후 7시 반에 라디오에 출연해 과학 불모지나 다름없는 조선에 과학지식을 보급하고자 역설했다. 드디어 과학데이인 4월 19일 밤 8시. YMCA 회관에서는 무려 8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주일 이상 진행된 과학데이 행사에는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과학강연회와 실험회, 과학관과 중앙전화국/중앙시험소/경성방직 등을 견학했고 과학영화를 관람했다. 과학데이 축제는 서울에 이어 평양에서도 개최되었다.
과학데이 행사로 인해 여러 조선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다.
제1회 과학데이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너도나도 김용관의 과학대중운동에 지지를 표했다. 이에 힘을 얻은 김용관은 1934년 7월 5일 서울 공평동 태서관에서 [고학지식보급회]조직을 알리는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총회에서 조만식/여운형/송진우/김성수/이상협 등이 고문에 추대됐고, 주요한/조동식/이극로 등 조선의 유명 지식인들이 임원으로 참여했다. 김용관은 전무이사가 되어 실무를 도맡았다.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게 된 과학지식보급회는 발명학회에서 운영하던 [과학조선]을 인수하고, 지방순회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조선 과학대중화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제2회 과학데이 행사
1935년 제2회 과학데이 행사는 과학지식보급회의 주관으로 전국적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과학데이라는 깃발을 앞세운 54대의 자동타가 종로에서 안국동을 돌아 을지로를 행진했고, 군악대는 김억이 작곡하고 흥난파가 작사한 [과학의 노래]를 연주했다. 행렬과 함께 [한 개의 시험관이 전 세계를 뒤집는다], [과학 대중화를 촉진하라] 등의 표어가 나부꼈다.
김용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다.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던 과학지식보급회와 과학데이는 식민지 치하에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독립운동의 일혼으로 비친 것이다. 일본 경찰은 1937년부터 과학데이 행사를 제지했고 1938년에는 과학데이 행사를 추진하던 김용곤을 체포했다. 김용관의 투옥과 함께 과학지식보급회는 곧바로 해체됐고 과학데이는 5회로 막을 내렸다.
이후 조용한 일생을 보내다.
1942년 가석방된 김용관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만주 등지로 떠돌이 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 귀국한 김용관은 과학데이를 추진하던 활동력을 상실하고 도자기회사 공장장과 경주공고 요업교사를 지내며 조용히 일생을 보냈다.
안타까운 마지막
가난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학을 생활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김용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과학대중화 운동에 헌신하느라 가장으로서 자신의 가정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고, 결국 가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1967년 쓸쓸히 세상과 이별한 김용관은 경기도 광명 철산동에 있는 천주교묘지에 묻혔으나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묘지가 헐리는 통에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 때문에 죽어서도 누울 자리를 못 잡았던 과학자 김용관이 내걸었던 과학대중운동의 가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 중임이 못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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