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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내용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날짜
매년 5월 12일
의의/목적
간호사의 사회 공헌을 기리기 위해 지정된 기념일로, 국제간호협의회(ICN)에서 1972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탄생일인 5월 12일로 제정하였다.
역사/유래
1971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개최된 국제간호사협의회의 각국 대표자회의에서 영국의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탄생일인 5월 12일을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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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나이팅게일
간단 설명
영국의 간호사, 병원/의료제도의 개혁자. 크림전쟁 중 이스탄불에서 야전병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간호사 직제의 확립과 의료 보급의 집중 관리, 오수 처리 등으로 의료 효율을 일신하여 [광명의 천사]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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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기 | |
연도 | 내용 |
1820년 ~ | 출생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5월 12일에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 중이던 영국인 부부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나이팅게일 집안 및 간호사가 된 계기 영국으로 돌아와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난 나이팅게일은 17세 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본인은 하느님으로부터 간호사가 되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가족은 결사 반대했다. 최초의 시도가 좌절된 이후, 나이팅게일은 여러 차례 청혼을 거절해 가면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집에 있을 때에는 의학 및 병원 관계 문헌을 입수해서 읽었고, 가족을 따라 국내외 여행을 할 때에는 혼자 인근의 병원과 요양소, 빈민수용소 등을 견학했다. |
TMI 나이팅게일 이름 '피렌체'를 영어로는 '플로렌스'라고 하는데, 그녀의 이름은 바로 이 지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TMI 가족들이 간호사를 반대한 이유 빅토리아 시대까지만 해도 간호사는 비천하고도 부도덕한 직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플로렌스처럼 버젓한 집안에서 태어난 처녀가 지원할 일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마치 내가 식모가 되겟다고 말한 것 같은 반응이 나왔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그 당시 가족의 반응을 훗날 이렇게 설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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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 31세 때 이집트 여행 중에 다시 한 번 자신의 소명을 확신했다. |
1853년 | 33세 때 드디어 런던에 있는 소규모 자선 요양소의 책임자가 되었다. |
TMI 이때 당시 나이팅게일의 어머니는 언제가 친구들 앞에서 울먹이며 이렇게 한탄했다고 전하였다. "우리는 오리인데 어쩌다가 야생 백조를 낳았을까." 하지만 전기 작가 리튼 스트레이치의 말마따나 "그 가련한 부인의 생각은 틀렸다. 그들이 낳은 것은 백조가 아니라 독수리였으니까." | |
1854년 | 흑배 북부의 크림반도에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오스만 측은 지원한 영국군의 경우에도 전사자가 5천 명이었던 반면, 전염병으로 인한 병사자가 1만 5천 명으로 무려 세 배에 달했다. 이에 영국에서는 뒤늦게야 부상병 간호를 위한 자원 봉사대가 조직되어 급파되었는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영국군 야전병원 근무 11월 4일, 나이팅게일은 38명의 간호사와 함께 전쟁터인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의 스쿠타리(위스퀴다르)에 도착해서 영국군 야전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당시 의료체계 당시 영국군의 의료 체계는 회악의 상황이었다. 병사를 소모품 정도로 생각한 군부의 아집과 편견 때문에 후방으로 수송된 부상병을 위한 시설은 형편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보급품과 의약품도 물품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웬만한 자선병원과 빈민가의 침상에도 눈 하나 꿈쩍 않았던 나이팅게일조차도 질렸을 정도였다. 그녀는 군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묵살당하기 일쑤였고, 병원의 의사들로부터도 협조를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인맥과 자금을 이용하여 야전병원의 조달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특유의 성실함과 결단력으로 찬사를 얻게 되었다. 나이팅게일 활약 전쟁 내내 나이팅게일은 후방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렀다. 영국 정부와 군부, 그리고 터키 정부에 만연한 관료주의와 씨름을 해가면서 야전병원을 운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이팅게일의 가장 탁월한 능력은 간호사로서의 자상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행정가로서의 철저함이었다. "그녀가 스쿠타리병원을 혼란에서 구하여 질서를 세운 일, 사재를 털어 영국 군대에 옷을 마련해 입힌 일, 관청의 빡빡하고 다루기 힘든 권력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확대한 일은 온화한 친절과 여성적인 자기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엄격한 방법, 단호한 규율, 세세한 것에 대한 정밀한 관심, 끊임없는 노력, 불굴의 의지와 확고한 결의를 통해서였다. 그녀의 냉정하고 조용한 태도 밑에는 맹렬하고 열정적인 불꽃이 숨어 있었다" - 리튼 스트레이치 - |
TMI 오늘날 크림반도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영토인 흑해 북부의 크림 반도는 기후가 온화한 휴양지로 유명하다. TMI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전쟁 이유 표면적인 원인은 종교 갈등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이에 대한 다른 유럽 각국의 견제였다. 이 전쟁으로 인해 군인이며 전쟁사가인 [버나드 몽고메리]는 "크림 전쟁은 '이렇게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 교훈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왜냐하면 전략과 병참 모두가 지극히 비효율적이어서 사상자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던 까닭이었다. TMI 나이팅게일의 반전 오늘날 나이팅게일이라고 하면 [백의의 천사]라는 표현이 떠오르지만, 크림 전쟁 당시 그녀의 별명은 "등불을 든 여인"이었다. 게다가 [흰색]이 아니라 짙은 색의 검소한 옷을 입었고, 성격 역시 [천사]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야전병원에서 밤마다 육군성의 시드니 허버트에게 써 보낸 편지에는 전장의 섬뜩한 현실뿐만 아니라, 군대와 병원에 가득한 자신의 적들을 향한 격렬한 비난이 담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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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 나이팅게일이 등장한 지 6개월 만에 야전병원의 운영은 훨씬 원활해졌고, 철저한 위생 관리 덕분에 환자의 사망률은 42퍼센트에서 2퍼센트로 뚝 떨어졌다. 전장은 물론이고 본국에서도 그녀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고, 빅토리아 여왕도 치하를 보냈다. |
1856년 | 2월에 파리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3년여 만에 전쟁이 끝나자, 그해 7월에 나이팅게일은 드디어 스쿠타리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온다. |
1859년 | 그녀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시드니 허버트가 육군성 장관이 되면서 군 의료 개혁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불과 2년여 뒤에 허버트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나이팅게일은 정계에서 강력한 후원자를 잃어버렸지만, 이때부터는 가난과 질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하면서 전반적으로 의료 및 위생 수준이 향상되었다. 나이팅게일 간호학교 설립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 당시에 영국에서 조성된 [나이팅게일 기금]을 이용해서 세인트토머스 병원에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설립했고, 이후 여러 곳에서 유사한 간호사 양성 기관이 설립되었다. 같은 해에 펴낸 [간호론]은 비록 일반 독자를 위한 저술이지만 오늘날은 간호학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
1869년 | 나이팅게일은 영국 최초의 여자 의사인 엘리자베스 블랙웰과 함께 [여성 의과대학]을 설립했다. 비록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이팅게일은 고전어와 외국어를 독학해 상당한 실력을 쌓았다. 그런가 하면 본인의 신앙을 해설하기 위한 신학 서적도 집필했는데, 그녀가 피력한 신비주의 사상은 그 당시의 주류 기독교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나이팅게일의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업적은 통계 분야에서 이루어졌으니, 본인이 조사한 영국군 야전병원의 여러 가지 현황을 한눈에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고안한 새로운 방식의 그래프 작성법으로 찬사를 얻었다. |
1910년 | 8월 13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잠자던 도중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생전의 공적을 인정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하자고 제안했지만, 친척들의 사양으로 햄프셔의 이스트웰로에 있는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
TMI 현재 나이팅게일 평가 나이팅게일은 근대 간호학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특히 철저한 위생 관리, 충분한 영양 공급, 아울러 정서적인 안정을 강조한 것은 당대의 통념에 당당히 도전한 탁월한 통찰로 손꼽힌다. 물론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일부 틀린 주장도 있지만, 이는 지극히 합리적인 인물이었던 나이팅게일이 당대의 [상식]에 근거해 행동한 까닭에 생긴 자연스러운 한계로 봐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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