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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곽재우 장군이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날" 6월 1일 의병의 날

by 고효길 2024.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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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목적

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일깨워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제정한 법정기념일로, 매년 6월 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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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래

2008년 8월 의령군수 등 1만 5586명이 [호국의병의 날] 기념일 제정을 국회에 청원하여 2010년 5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근거해 6월 1일로 지정되었다.

TMI 6월 1일인 이유는?
이날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의병장이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날(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으로,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의 첫날이기도 하다.

 

간단 설명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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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홍의장군 곽재우의 활약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청암진과 세간리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적이 의심하도록 하기 위한 위장 병사)을 구사해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수십 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000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병력을 바탕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해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했다. 왜군의 진로를 차단해 계획한 홓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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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 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을 기습해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현품/창녕/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해 물리쳣다.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의 1차 진주성 전투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형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해 왜장 가토의 접근을 막았다.

곽재우 [출처 : 네이버]

일대기
연도 내용
1585년 34세의 나이로 별시의 정시 2등으로 뽑혔다. 그러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수일만에 전방을 파해 무효가 되었다.

그 뒤,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거름강) 위 돈지에 강사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 해 7월에 유곡찰방에, 곧 이어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0월에는 절충장군에 승진해 조방장을 겸했다.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의 악견산성 등 성지 수축에 열중했다.
형조 정랑 : 조선 시대에, 형조에 속한 정오품 벼슬. 정원은 3명이며, 그중 1명은 무관에서 임명하였다.
절충 장군 : 조선 시대에 둔, 정삼품 당상관 무관의 품계. 어모장군의 위
성주 목사 : 조선 시대 성주목을 관할하던 최고위 관직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로 돌아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 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을 신축했다. 그러나 그 역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해 8월 창년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수비했다.

그 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방어사 : 각도에 배속되어 요지를 지키는 병권을 가진 종이품의 벼슬로, 병마절도사 다음의 직위이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그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이 문제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으로 귀양갓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뒤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서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 남쪽 창암진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다.
1604년 찰리사가 되어 인동의 천생산성을 보수했다.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찰리사라는 벼슬마저 사퇴했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해 10월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되고, 다음달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로 승진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한성부우윤을 역임하였다.
부사 : 조선 시대에 둔 대도호부사와 도호부사를 통틀어 이르던 말
동지중추부사 : 조선 시대에, 중추부에 속한 종이품 벼슬
우윤 : 조선시대 한성부 소속의 종2품 직제
1608년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병마절도사 : 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무관직.
용양위 : 조선 시대 둔 오위의 하나
부호군 : 조선 시대, 오위도총부에 속한 종사품의 벼슬. 보직을 맡지 않은 문관과 무관, 음관으로 임명.
삼도수군통제사 : 임진왜란 중에 설치된 종2품 외관직의 조선무관.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의 부호군, 호분위의 대호군 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에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했다.
호분위 : 조선 시대에 둔 오위의 하나.
부호군 : 조선시대 오위의 종4품의 관직. 관계상으로는 정략장군/선략장군이라 별칭되었다.
오위도총부 : 조선시대의 중앙군인 오위를 지휘 감독한 최고 군령기관
부총관 : 조선 시대에, 오위도총부에 속한 종2품 벼슬. 부총관의 수는 5명이었고, 관원이 1년에 한 번씩 교대하여 맡았다.
좌윤 : 종2품 벼슬
관찰사 : 조선시대에 각 도의 지방 통치를 관할하던 종2품의 지방 장관이다.
1612년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을 신구하는 소를 올리고 낙향했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가지 않고, 이듬해 죽었다.
판결사 : 장례원의 장관이며 노비송사에 대한 판결책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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