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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YH사건으로 시작되어 부마민주항쟁으로 번지다"

by 고효길 2024.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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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목적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 유신 독재에 반대한 시위사건이며, 매년 10월 16일이다.

 

역사/유래

부마민주항쟁의 배경 및 계기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회복'의 기치를 든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된 후 정국은 여야격돌로 더욱 경색되었다.

 

이어 8월 11일 YH사건,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유신 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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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운데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선별수리론]이 제기되어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부마민주 항쟁 시작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6일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전개되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 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부마민주항쟁 관련 기사와 광복동 거리를 휩쓰는 부산대학생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시위 후 연행 및 군사재판, 유신체제 종결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비상계염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한 10.26사건이 발생하면서 유신 체제는 종결되었다.

 

그 결과 국가기념일로 지정

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이념을 계승한 민주항쟁의 하나로 평가받으며, 2019년 9월 17일 부마민주항쟁 발생일인 10월 16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부마민주항쟁 정리표
날짜 주요 사건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
정국여야 격돌 심화
1979년 8월 11일 YH사건 발생
1979년 9월 8일 김영삼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의원직 박탈.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 고조.
1979년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 사퇴서 제출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 제기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 배포
(부산은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5천여 명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한 대규모 반정부시위 전개.
1979년 10월 17일 시위대, 정치 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를 외치며 파출소, 경찰서, 도청, 세무서, 방송국 등을 파괴
1979년 10월 18일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 확산
정부, 부산 지역에서 비상계엄령 선포.
1천여 명 연행, 66명 군사재판에 회부.
1979년 10월 20일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 발동.
군사 출동하여 시위대 중 505명 연행, 59명 군사재판에 회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사망
국무총리 최규하를 중심으로 한 과도내각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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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사건(YH무역농성사건)

요약

가발제조업체인 YH무역이 부당한 폐업을 공고하자 이 회사 노동조합원들이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1979년 8월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인 사건.

YH 사건 만화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사건의 배경

1966년 자본금 100만 원, 종업원 10명으로 설립한 작은 가발 제조업체였으나, 가발 경기의 호황과 정부의 수출 지원책에 힘입어 1970년대 초 종업원이 최대 4,000여 명에 이르는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창립자인 장용호는 미국에서 백화점 사업체를 설립해 외화를 빼돌리는 한편, 은행 빚을 얻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1978년 제2차 석유파동 이후 가발산업의 후퇴와 수출 감소 등으로 인해 회사 운영이 어려워지자 노동자를 500여 명으로 줄이고, 이듬해 4월 폐업을 선언한 뒤, 다시 같은 해 8월 2차 폐업을 공고하였다.

 

사건의 계기

이보다 앞서 1975년, 이 회사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이후 위장휴업과 공장이전에 대한 노사협의 및 인원 감소 때의 충원 등을 약속받았으나, 1979년 8월 6일 부채와 적자 운영,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 등을 이유로 회사가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하였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폐업 철회와 임금 청산, 고용 승계를 위한 농성을 시작하는 한편, 회사측과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주), 관계기관에 회사 정상화를 호소하였다.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YH 여공들 / 여공 강제해산 시키는 경찰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사건의 시작

그러나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급기야 회사가 기숙사/식당까지 폐쇄하자 결국 신민당에 호소하기로 결정하고, 8월 9일 200여 명의 노동자가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다음 날 노동자들은 회사의 은행관리기업 인수, 회장 장용호의 소환, 기업 정상화 및 생계대책 강구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8월 11일 새벽 2시 1,000여 명의 경찰이 신민당사에 난입해 폭력을 휘드며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하고, 취재하던 기자 및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당원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였다.

 

사건 결과

이로 인해 노조 집행위원장인 김경숙이 사망하고, 경찰을 제지하던 172명의 여성 근로자와 신민당 당원 26명이 강제 연행되었다. 이어 농성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문동환/인명진 등 8명이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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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직후 폭력 진압과 강제 연행에 반대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이로 인해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의원직에서 제명되었다. 이후 사건의 여파는 계속 확대되어 기독교/학새/청년세력 들의 반유신 연대투쟁을 촉발하는 등 1970년대 말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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