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 내용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나무위키
날짜
매년 12월 25일
TMI 성탄절은 예수의 탄생일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지, 실제로 탄생한 날이 아니다. 성경에는 예수의 탄생일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후대 제자들이나 초대 교부들을 통해 확실하게 전승된 바도 없다. 이 때문에 예수의 정확한 탄생일의 날짜나 교회에서 성탄의 의식을 실제로 시작한 시기에 관해서도 신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가톨릭 대사전에서도 이를 언급하고 있으며, 개신교의 신학대학원에서도 기본적으로 성탄절이 예수의 탄생일이 아님을 가르친다.
TMI 12월 25일인 이유는?(가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가설로는 기독교 공인 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274년 [무적의 태양신]의 신전을 지으면서 동짓날인 12월 15일을 [무적 태양 탄생일]로 제정한 것이라 본다. 이유는 아우렐리아누스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이는 스스로를 신격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날이다. 또한 3~4세기의 로마에 보급된 미트라스교의 중요한 제일이었다.
이 가설에 따르면 기독교의 종교적 입지가 역전되었을 때, 로마인의 융화적 전통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습합신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보급할 목적으로 [무적 태양 탄생일]을 [예수 탄생일]로 바꿔 기념한 것이 기원이라 본다. 그 후 350년에 교활 율리오 1세가 12월 25일을 예수의 생일로 공식 선언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이 가설을 최초로 제기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은 12세기 시리아 정교회 주교였던 디오니시우스 바 살리비가 있다. 바살리비는 '12월 25일 = 크리스마스'라는 서방 교회의 가르침이 이처럼 이교와의 타협에 입각한 것이라고 보았고, 그에 맞서 성탄절을 1월 6일로 본느 시리아 정교회의 교리를 옹호했다. 이 가설은 19세기 종교학자인 헤르만 우제너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결론
성탄 대축일의 뿌리가 어디까지인지를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틀이 갖춰진 것은 분명 3세기이다.
이유는 동방 교회에서는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이, 서방 교회에서는 12월 25일 성탄 대축일이 성립된 것이 대략 비슷한 시기엿다. 다만 축일 성립 과정의 바탕이 되는 종교/문화적 맥락이 달라 축일의 의미에 부여되는 강조점도 달랐다. 그러나 궁극적인 의미는 동일했다.
즉, 새로운 빛이요 역사상 진정한 태양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다.
의의/목적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기념일이다.
역사/유래
성탄절 시초
[신약성서]에 따르면 마리아의 처녀 회임으로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날이 언제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 교도는 1월 1일, 1월 6일, 3월 27일 등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였는데, 교회로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는 않았다.
고대 노르웨이가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 겨울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축제인 크리스마스는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온 행사이다. 낮이 가장 짧고 어두운 계절인 겨울에는 사람들에게는 따뜻함과 빛, 그리고 사랑과 우정 같은 것이 필요했다. 고대 노르웨인들은 아주 긴 장작에 불을 붙인 다음, 그것이 다 탈 만큼의 긴 시간 동안 크리스마스를 즐겼다. 보통 12일에 이르는 고대 노르웨이의 크리스마스는 아마도 [12일 간의 크리스마스]라는 전통의 기원일 것이다.
크리스마스 원래 기독교의 예배력에 포함되어 있는 날이 아니었다. 또한 12월 25일도 성경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4세기경에 율리우스 교황이 농신제에 기독교적인 색채를 가미하기 위한 일환으로써 12월 25일을 교회의 휴일로 정했다. 처음에는 [탄생의 축제]라고 했던 이 관습이 이집트에 전파된 것은 432년 즈음이었고, 영국에는 6세기 말에 전해졌다.
TMI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사실 3월 25일이다? (가설)
먼저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결정할 때 출발점은 놀랍게도 3월 25일이다. 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아프리카의 교부 테르툴리아노(150~207?)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널리 알려진 사실, 곧 그리스도께서 3월 25일에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전제로 삼았다. 갈리아에서는 6세기까지 이날을 부활대축일로 지켜졌다. 아프리카 역시 243년에 작성된 부활 대축일의 날짜 계산에 관한 다른 문헌에서 3월 25일을 천지 창조의 날로 해석해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정하는 독특한 계산법을 볼 수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태양이 만들어진 것은 창조 나흘째 되는 날이다. 곧 3월 28일이다 따라서 이날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진정한 태양이 떠오른 날이라는 의로서 말이다.
이러한 견해가 3세기에도 계속해서 다듬어지고 변화되는 가운데 마침내 그리스도의 수난일과 수태일을 같은 날로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3월 25일에 천사가 주님의 탄생을 예고하고 주님이 성령에 의하여 동정 마리아의 태내에 잉태된 것을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결론
이에 12월 25일(3월 25일에서 9개월 뒤)을 성탄 대축일로 정하는 것이 서방 교회에서는 3세기에 진행되며 자리를 잡았다. 반면 동방 교회에서는 1월 6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기렸다. 이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되던 신비로운 신들의 탄생 기념 축제에 대한 해답도 이루어졌다고 본다.
3세기 공식적인 성탄절 날짜를 정하다.
3세기의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성탄절을 정하는 것이 이교적이라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성탄절은 12월 25일로 고정되었다.
4세기 본격적으로 성탄절을 기념하다.
본격적으로 축하하게 된 것은 교황 율리우스 1세(재위 337~352)때이며, 동세기 말에는 그리스도교 국가 전체에서 이날에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게 되었다. 오랜 논의 끝에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로 고정된 것은 초기 교회 교부들의 체험과 영지에 의한 것이었다.
TMI 성탄절 초기 행사
일반적으로 이 시기에 큰 축제를 행하는 것은 고대 시대의 사회의 습관이었다. 그중에서도 요람기의 그리스도 교회가 개종을 원했던 로마인이나 게르만인 사이에는 동지 제사가 성대하게 행하여졌는데 창고에는 수확된 곡물이 가득 차 있다. 목초가 부족한 겨울을 대비해서 도살한 가축의 고기도 충분히 저장되어 있다. 1년의 힘든 노동에서 해방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이 시기, 사람들은 이어서 찾아올 식량부족을 잊고, 먹고 마시는 성대한 축제를 행하였다.
생명의 은혜를 준 태양의 힘을 약화시키기고, 겨울을 가져올 자연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공물을 바치고, 풍작/풍요를 기원해서 불을 피웠다. 온 세상의 초목이 메마를 때 푸르름을 유지하는 상록수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 장식되었다.
TMI 성탄절 일주일 전부터 제사를 지냈다?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는 사투르날리아라고 불리는 농경신 사투르누스의 제사가 행하여졌다. 이 기간에는 집집마다 밝게 불이 켜지고, 상록수가 장식되었으며 선물이 교환되고 남자들은 여자의 의복이나 동물가죽 등을 두르고, 보통은 금지되어 있던 행위가 행하여졌는데 주인과 노예가 자리를 교환하는 소동도 행하여졌다.
TMI SUNDAY 어원이 성탄절에 의해 탄생했다?
로마의 사투르날리아와 게르만의 율 축제의 시기가 성탄절로 선택되었을 시기에 미트라스교는 그리스도교의 강적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보다 앞서 유사점이 많은 미트라스교와의 습합을 고려하여 321년에 매주 휴일을 [태양의 날(dies solis = sun day)]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중세 시대 성탄절을 영국에 전도하다.
597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영국 전도를 개시했을때, 크리스마스는 로마교회의 3대 축일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이듬해 크리스에 1만명 이상의 앵글로 색슨인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라는 용어는 [앵글로 색슨 연대기]의 1043년의 항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전에는[동지제] 또는 탄생을 의미하는 [nativity]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TMI 중세 성탄절 행사
약 1세기 후, 베다는 이 날이 원래 [어머니들의 밤]이라고 불리며, 어머니인 여신의 축일이었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개종해도 관대한 교회의 자비에 의해서 죄없는 이교의 축제를 즐겼던 것이다. 그들은 상록수로 장식하고 율의 통나무를 태우고, 가면극이나 주술적인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이와 같이 영국의 크리스마스는 율과 탄생절의 습합으로서 성립하고, 앵글로 색슨력은 이날부터 신년을 기산하게 되었다.
이런 관습은 중세 말까지 남아 있었다. 알프레드 대왕은 크리스마스에서 공현제까지 성스로운 기간으로 정하고, 노동을 금하였는데 왕이 878년 데인에게 일시적으로 패배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종교개혁 이후(16세기 ~ 17세기)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에도 크리스마스는 잉글랜드 교회의 3대 축일의 하나로서 축하되었다. 당시의 문학작품등에 의하면 크리스마스는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시간, 진정한 기쁨의 시간, 친구/친척과 정을 돈독히 하고, 가난한 이웃을 환대하는 시간이었다.
1627년의 크리스마스에 추밀원은 런던 주교에게 영국에 망명해온 프랑스의 신교도 구제를 위해서 주교구 전체에서 기부금을 모으도록 명령하고, 크리스마스 정신을 간청했다.
TMI 종교개혁 성탄절 행사
이 시대는 궁정생활의 화려함에 비해서 지방에서는 빈부의 차가 심화되어 과거의 인간관계가 붕괴되기 시작한 시대였다. 크리스마스는 가난한 이웃을 환대하라는 문구가 저술가들에게 특히 강조되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 제임스 1세는 고향사람들을 환대하도록 크리스마스에는 신하들을 귀성시켰다. 지방자치체는 귀족/젠틀리에게 이 환대를 의무지웠는데 특히 흉작일 때는 그것이 지방의 치안유지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퓨리탄 혁명시대
왕당파와 영국 교회는 즐거운 전통적 습관을 상징하는 날로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했다. 그러나 근엄한 퓨리탄은 이 날을 로마 가톨릭의 축일로서 비난하고, 폭음폭식, 댄스, 도박, 대소동 등 악으로 연결되는 축제로서 공격했다. 이미 [제약의 해부] (1583)의 저자 P. 스터브스는 극장/연극을 비방하고, 가면극을 가장해서 도둑, 매음, 살인 등이 크리스마스처럼 횡행하는 시기는 없다고 기술하였다.
17세기의 퓨리탄은 [크리스마스는 주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바쿠스신의 축제이다. 이교도는 이를 보고 예수는 탐식한 향락주의자, 음주가, 악마의 친구라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한탄하였다. 온건파는 지나친 행동을 시정하는데 그쳤다. 장기의회도 크리스마스에 간섭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1644년, 그들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교회의 압력의 의해서 태도결정이 강요되었다. 장로파는 1583년, 스코틀랜드에서 크리스마스를 완전히 금지하였다. 그후 왕의 명령으로 한때 부활하였지만, 다시 크리스마스를 금지하였다. 의회파의 지도자들은 장로파의 크리스마스 금지요구를 잉글랜드에서 실시할 것을 거부하였지만 곧 굴복하였는데 그것은 의회파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만 효과를 거두었다.
1647년, 의회파는 크리스마스 금지법안을 가결하고자 하였다. 이때 이에 반대하는 폭동이 각지에서 일어나 마침내 가정에서의 크리스마스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TMI 퓨리탄이란?
16~17세기 잉글랜드 및 뉴잉글랜드에서의 개혁적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 신자의 총칭으로 통상 [청교도]라고 번역된다. [퓨리탄]이라는 명칭은 최초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앵글리카니즘(영국국 교회 중심주의)에 의해 종교정책을 철저하지 않은 종교개혁으로 보고, 국교회를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뱅의 교회개혁의 모델에 따라서 철저하게 개혁하고자한 프로테스탄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단어로서 의미로는 '청교도적인 사람, 철저한 금욕주의자' 라고 한다.
청교도 : 16세기 후반, 영국 국교회에 반항하여 생긴 개신교의 한 교파. 칼뱅주의를 바탕으로 모든 쾌락을 죄악시하고 사치와 성직자의 권위를 배격하였으며, 철저한 금욕주의를 주장하였다.
왕정복고(1660년) 이후
크리스마스는 다시 교회의 3대 축일의 하나가 되고, 사람들은 이를 자유롭게 축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경제상의 변화는 과거에 시골의 지주저택에서 확산된 전통적 크리스마스의 모양을 바꾸어서, 소박한 사람들의 소동도 폐지하고, 종교심도 희박해지게 되었다.
이 변화는 천천히, 불균등하게 진행하였다. 크리스마스 휴일이 제정되고, 대학, 학교, 재판소, 의회는 크리스마스에서 공헌제까지를 휴일로 하고, 관공청은 이 기간의 일수를 다망한 부서는 그 일부를 휴일로 하였으며 일부 사람들은 성촉제(2월 2일)까지를 크리스마로 생각했다.
19세기에는 산업혁명의 여파로 노동조건이 매우 가혹해져 크리스마스 휴일은 당일만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부유한 가정에서는 화려하게 축하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이를 축하할 비용이 없는 사람들이 증대하여, 크리스마스는 결국 사멸할 것으로 보였다.
TMI 왕정복고란?
혁명이나 기타의 사정으로 일단 폐지되었던 왕정(왕이 다스리는 정치)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다. 대표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에스파냐가 있다.
영국의 왕정복고
1658년 O. 크롬웰이 죽은 뒤 그의 셋째 아들 R.크롬웰이 뒤를 이어 호국경이 되었으나 그는 원래 군인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대의 불신을 받았고 종교계로부터도 불만을 사서, 이듬해 사직하였다.
그러자 의회가 국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군대를 그 통제하에 두려고 함으로써 군대가 반발하여 거꾸로 의회를 무력으로 해산시켜, 국가체제는 혼란에 빠졌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스코틀랜드에 주둔하고 있던 장군 G.멍크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런던에 들어와 최후의 장기의회를 열게 하여, 임시 의회의 소집을 결의시켰다.
한편 그는 네덜란드에 망명중인 차스 2세와 은밀히 연락하여, 혁명파에 대한 보복을 단독으로 행하지 않을 것, 혁명중에 왕당파의 토지를 입수한 자의 소유권을 확인할 것, 신앙의 자유, 병사들에 대한 급료지불 등을 약속한 [브레다선언]을 발표하게 하였다. 소집된 임시의회에는 왕당파와 장로파가 많았으므로, 이 선언을 승인하고 찰스를 국왕으로서 영입할 것을 결의하여, 이에 따라 그가 귀국하여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빅토리아 시대
19세기 중엽, 크리스마스가 부활하였다. 그것은 처치스트운동의 시대로, 대영제국의 위광이 가장 확대된 시기였다. 새로운 크리스마스에서는 이웃사랑, 자선이 중시되고, 종교심의 부활에 의한 종교적 측면의 보정이 행하여지고, 그 위에 과거의 화려한 축제의 관습이 빛을 더했다. 특히 크리스마스가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의 축제가 된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크리스마스 트리, 산타클로스, 크리스마스 카드가 도입되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부활하고,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크리스마스 정찬(저녁식사)이 서민 가정에 진출하였는데 오늘날의 크리스마스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새로운 크리스마스의 성립에 크게 기여한것은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과 C. 디킨스이다.
TMI 앨버트 공과 C.디킨스의 활약
앨버트 공은 독일에서 크리스마스 트리의 습관을 윈저 성의 가정 크리스마스에 도입하고, 디킨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해 몇 가지 문학작품을 공간하여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전하고, 동시에 크리스마스의 존재모습, 물질적 즐거움을 향유하기 위해서 수행해야 할 자선 등의 의무를 가르쳤다.
새로운 크리스마스는 급속히 침투하여, 공론가나 반대론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비국교도도 어린이들이 친구들의 즐거움의 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예배당의 일부는 회원이 국교회로 를러들어가기 시작한 것을 보고 크리스마스 예배를 개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비국교도의 태도도 연화하여, 영국국민이 새로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게 되었다.
이런 추세에 의해서 단축된 크리스마스 휴일도 복싱 데이(Boxing Day, 크리스마스의 다음날로 이날에 사용인이나 우편배달부 등에게 축하 선물을 준다)까지 연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은행, 관청만이 아니라 19세기 말까지는 일반 상공업 종사자에게는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모두가 함께 축하하는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성립된 것이다.
TMI 그럼 우리나라 크리스마스 유래는?
1949년 감리교 신자였던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기독탄생일]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75년 정부가 [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면서 [기독탄생일]도 [기독탄신일]로 명칭이 함께 변경되었다.
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크리스마스 트리
프롤로그
크리스마스 기간의 중심적인 장식물은 크리스마스 트리이다. 이것은 프랑스/이탈리아/에스파냐 등지에서도 교회 앞에 높이 세워지는 겨울의 미관이다 집집마다 가지가 곧은 푸른 나무를 잘 손질하여 통같은 데 꽂아 양초/완구/인형/종이로 만든 종/과자 따위를 달아매고, 또 가지나 뿌리 위에는 눈송이를 본떠 솜을 얹는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방안에 들어설 때에 양초에 불을 붙인다. 최근에는 여러 가지 전구가 쓰인다. 나무도 플라스틱을 재료로 한 인조제품들이 많이 사용된다.
유래
크리스마스 트리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영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전도활동을 한 성 보니파티우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그리고 마틴 루터의 이야기와 고대 로마에서 기원됐다는 설도 있다.
보니파티우스의 이야기
보니파티우스는 게르만족이 패마다 숲 속의 전나무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보고, 옳지 않은 일이라 생각해 이 나무를 베어내 향후 제물이 될 사람들을 구해냈다. 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빠졌던 사람들은 이에 안도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낸 결과로 재앙이 닥칠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 나무는 다음해 봄에 다시 싹을 틔운 것은 물론 어떤 재앙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감복한 사람들은 이 나무를 둘러싸고 감사를 드리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이 나무에 모여 예배를 보는 관습이 생겼다. 이것이 뒤에 크리스마스의 장식으로서 사용되었다.
마틴 루터의 이야기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교수인 마틴루터(1483~1546)에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루터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 별빛 아래 상록수가 서 있는 모습에 감명르 받았다. 루터는 끝이 뾰족한 상록수가 마치 하늘에 있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으로 보여 이와 같은 나무를 준비해 방에 세우고 거기에 별과 촛불을 매달아서 장식을 했는데, 여기에서부터 크리스마스 트리가 유래됐다는 설이다.
고대 로마에서 기원
고대 로마에서 크리스마스 트리가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에 따르면 고대 로마인들은 한겨울 동짓날을 기념하기 위해 푸른 상록수 가지를 집에 장식했는데, 이러한 성목 숭배 사상이 크리스마스 트리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TMI 크리스마스를 왜 X-mas로 표기할까?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Christ(그리스도)와 Mass(미사)를 합친 말이다. 즉, [그리스도께 드리는 미사 또는 예배]라는 뜻이다. 크리스마스를 X-mas라도 쓰기도 하는데, X-ams의 X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그리스어인 [크리스토스]의 머릿글자를 딴 것으로, 이를 영어 철자로 바꾸면 Christos다.
즉, X는 영어 알파벳이 아니고, 영어의 Ch에 해당하는 희랍어인 것이다.
팩트
크리스마스의 풍습으로서 그리스도교 세계를 비롯해 세계에 퍼져있는데, 그 기원은 유럽에서도 결코 오래되지 않았다. 독일 문화권에서 일어났다고 하며, 현재 알려진 가장 오래된 예는 16세기 초의 L. 크라나하의 동판화에 그려진 것이다.
또한 1605년의 알자스 지방의 여행기에는 슈트라스부르크(현, 스트라스부르)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색종이로 만든 장미꽃이나 사과, 설탕 등을 장식한 나무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원래 크리스마스 날부터 공현제(1월 6일)까지 장식되며, 공헌제에 비로소 과자나 장식을 치운다는 습관에서, 신년을 맞이하는 행사였다고 생각된다.
독일 각지에서는 옛날부터 동지나 신년에 생명력의 상징인 상록수의 가지를 창이나 천정에 장식하는 풍습이 있으며, 또한 트리에 장식된 음식물이나 등에도 풍요의 기원이나 악마방지의 의미가 있다.
결론
즉, 그리스도교와 게르만 고래의 신년이나 수확제의 행사가 결부되어서 탄생한 것이다. 17세기 중엽에는 독일 궁정의 습관으로서 도입되어, 19세기에는 부유한 시민 가정에서 일반적으로 확산되었다. 영국에는 하노버가를 통해서 전해지고,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TMI 크리스마스 트리 여러 용어 뜻
체육
볼링에서 오른손잡이를 위해 3, 7, 10번 핀을 남겨두고 왼손잡이를 위해 1, 7, 10번 핀을 남겨둔 스플릿. 때로는 1, 7, 10번 핀을 남겨둔 것을 크리스마스 트리라고도 한다.
자동차용어
스타트 신호를 하는 전기식 표시등을 말한다. 그 모양과 전구의 점멸하는 모습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이 용어가 사용되지 않는다.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산타클로스
유래
시초
산타클로스의 효시로 알려진 인물은 280년경 소아시아 지방의 항구 도시였던 파타라에서 태어난 성 니콜라스다. 그는 타인에 대한 인정이 지극히 많앗던 사람으로 후에 미라의 대주교가 되어, 남몰래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선행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어느날 어렵게 사는 이웃을 몰래 도와주기 위해 이웃의 굴뚝으로 금화를 던졌다. 그런데 그 돈 주머니는 우연히 이웃이 집안 화롯가에 걸어둔 양말 속으로 들어갔고, 이때부터 어린이들은 산타클로스가 굴뚝을 통해 내려와 선물을 두고 간다고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기일이 12월 6일이었다. 그가 성인으로 추대된 후에는 그의 기일이 그를 기리는 날이 되었다. 네덜란드에는 여전히 성 니콜라스의 날을 기념하고 있으며 아이들은 이날 [세인트 닉]으로부터 쿠키와 사탕을 받기 위해 신발을 바깥에 내어 놓는다.
[세인트 닉]의 네덜란드식 애칭은 [신터 클라스]로써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정착민이 그들의 전통을 신대륙에 전파하면서 Sinter Klass는 Santa Claus가 되었다. 소설가 워싱턴 어빙이 그의 소설 [뉴욕의 역사]에서 성 니콜라스를 뉴욕의 수호성인으로 만들면서 산타클로스는 더욱 대중화되었다. 이때 미국의 시사만화가였던 토마스 나스트가 [하퍼스 위클리]라는 잡지에 풍채가 있는 외양을 지닌 산타클로스 삽화를 그리면서 현재의 산타 모습이 시작되었다.
이후
19세기 중반에 새롭게 등장한 백화점과 상점에서는 심심치 않게 세인트 닉, 즉 산타클로스의 모습을 이용한 크리스마스 쇼핑에 대한 광고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841년에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 상점의 주인 산타클로스 옷을 입은 남자를 고용한 다음 사점 굴뚝에 올라가 있도록 했다.
산타클로스가 빨간 옷을 입게된 이유
우선 1931년 미국 해돈 선드블롬이 코카콜라 광고를 위해 그린 그림에서 유래됐다는 것으로, 여기서 산타클로스가 입고 있는 빨간 옷은 코카콜라의 상표 색깔이고, 흰 수염은 콜라 거품을 상진한다. 이 코카콜라사의 산타클로스는 대대적인 광고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면서, 현재의 산타클로스 이미지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설이다.
다른 설은 가톨릭의 추기경이 붉은색의 옷을 입었기에, 천주교 사제였던 성 니콜라스 역시 붉은색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결론
산타클로스의 모티브 인물은 성 니콜라스이며, 미국 뉴욕의 잡지로 인해 산타클로스라는 캐릭터가 외관과 이야기가 구체화되었고, 이것을 19세기에 들어선 백화점이 마케팅으로 이용하여 더욱 널리 알려졌다. 산타클로스의 시그니처 복장은 코카콜라 광고로 인해 고착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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