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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겨울 기념일로 상식 채우기[12월 27일 원자력의 날, 원자력 안전 및 진흥의 날]

by 고효길 2023.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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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내용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날짜

매년 12월 27일이다.

TMI 기념일 날짜가 12월 27일인 이유는?
2009년 12월 27일 아랍에미리트(UAE)에 첫 한국형 원자력발전소를 수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2010년 12월 개정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제41번째 정부 주관 기념일이 되었다.

의의/목적

원자력 안전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원자력 산업의 진흥을 촉진하기 위하여 제정된 국가기념일이다.

TMI 기념일 행사 내용
원자력의 날에는 주관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한국원자력산업협회와 함께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기념행사에는 관련 부처와 원자력계 관계자들이 참석하며 특별가연 및 원자력 산업에 기여한 유공자 포상 등이 진행된다.

역사/유래

기념일 시초

원자력 분야 종사자들의 안전의식 제고, 대국민 안전문화 확산 및 철저한 안전성 확보 도모를 위해 1995년 9월 10일을 [원자력 안전의 날]로 제정하고 제1회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법정기념일로 제정되다.

아랍에미리트(UAE)에 첫 한국형 원자력발전소를 수출한 것을 계기로, 2010년 [원자력 안전 및 진흥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다.

TMI 다른 나라들의 원자력의 날
@ 일본 : 원자력의 날이며 1964년 제정, 매년 10월 26일이다.
@ 러시아 : 원자력 종사자의 날(The Day of Nuclear Worker)이며 2005년 제정, 매년 9월 28일이다.
@ 이란 : 핵기술의 날(National Nuclear Technology Day)이며 2006년 제정, 매년 4월 9일이다.
@ 카자하스탄 : 원자력 산업 종사자의 날(The Day of Nuclear Industry Workers)이며 2008년 제정, 매년 9월 28일이다.

 

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원자력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간단 요약

원자력은 원자 내부의 핵반응에 의해 발생되는 에너지를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TMI 원자력의 핵반응
핵반응은 핵분열, 핵융합, 자연방사능 붕괴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발생할 수 있다. 핵반응에 의해 발생하는 에너지는 다른 화학적, 전기적 등의 방법으로 발생한 에너지보다 매우 크게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로 원자력은 여러 분야에서 활용이 시도 되었으나 이때 핵반응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는 매우 크기 때문에 다루기가 어렵고, 반응 이후에 방사성 물질이 생성되는 문제로 인해, 다른 에너지에 비해 활용의 범위가 다소 제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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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역사/유래

원자력 시초 과학자 뢴트겐이 발견하다.

1895년 독일의 과학자 뢴트겐(1845~1923)은 진공관으로 실험을 하던 중 최초의 방사선인 X-선을 발견하게 된다.

 

과학자 베크렐이 투과력 발견하다.

X-선 발견 후 1년 뒤인 1896년 프랑스의 과학자 베크렐(1852~1908)은 사진을 현상하던 중 우연히 우라늄 광석으로부터 X선과 같이 투과력이 강한 방사선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방사선이 자연 광석에서 발견된 최초의 발견이었다.

 

퀴리 부부 방사선에서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하다.

1898년 퀴리 부부(1867~1934)에 의해 더욱 강한 자연 방사선을 방출하는 라듐과 폴로늄이 발견되었다. 후에 불안전한 핵들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다른 종류의 방사선들이 방출된다는 것이 알려졌다.

 

과학자 러더퍼트, 알파선과 베타선을 발견하다.

1899년 영국의 과학자 러더퍼트(1871~1937)는 방사선에 알파선과 베타선의 두 종류가 있음을 밝혔다.

 

과학자 발라드, 감마선을 발견하다.

1900년 프랑스의 과학자 발라드(1860~1934)는 투과력이 매우 강한 감마선이 더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방사선 붕괴는 중성자나 중성미자 등의 입자들을 찾는데 큰 도움을 주는 등 핵물리학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과학자 한, 슈트라스만, 마이트너가 핵분열을 발견하다.

1938년 한(1879~1968)과 슈트라스만(1902~1980)은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는 실험을 통해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큰 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몇 주 후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마이트너(1878~1968)는 이 에너지가 중성자와 충돌한 우라늄이 비슷한 질랴의 다른 원소로 쪼개지면서 방출되는 에너지임을 알게 되었고, 이를 핵분열이라 하였다.

 

1942년~1946년 원자력 발견 후 군사적 목적으로 연구하다.

1940년대에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1942년에 페르미를 비롯한 시카고 대학의 연구진이 제작한 시카고파일-1(CP-1)이 연쇄반응을 처음으로 성공시키면서, 원자력을 이용하는데 기술적 장벽을 허무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세계 최초의 원자로인 시카고파일-1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원자력이 실용적으로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2년부터 1946년까지 군사적 목적을 위해 비밀리에 진행된 [맨하튼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다. 맨하튼 프로젝트는 순도 높은 대량의 핵연료로부터 연쇄반응을 발생시킴으로서 역사상 유례없는 다이너마이트 킬로톤급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생성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45년 맨하튼 프로젝트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계기가 되었다. 현재에는 이 프로젝트의 산물로서 생산된 핵무기는 강력한 에너지 분출과 피폭된 지역의 오랜 기간의 방사성 오염을 야기할 수 있다. 현재 인류 문명을 한순간에 종식 시킬 수 있는 원자력은 강력하면서 동시에 매우 위험한 원자력으로 인식되고 있다.

 

1946년 원자력을 이용하여 핵잠수함을 만들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원잔자력을 개발하기 위해 추진된 맨해튼 계획은 미 육군의 소관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 해군은 핵에너지의 개발에서 더 이상 뒤쳐져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면서 핵에너지로 추진력을 얻는 잠수함 개발에 착수했다. 1946년에 시작된 핵잠수함 개발 프로젝트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리코버 대령이었다.

TMI 핵잠수함 프로젝트 이야기
당시에는 핵에너지의 이용에 관한 기술이 발아하는 단계에 있었으며, 우수한 원자로를 모색하기 위한 실험이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특정한 유형의 원자로를 선택하기 위해서 매우 많은 실험과 데이터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가능한 한 빨리 핵잠수함을 만들고자 했던 리코버는 과학자들의 유보적인 태도를 물리치고 감속재와 냉각재로 물을 사용하는 원자로를 선택했다. 원자로를 제작하는 일은 웨스팅하우스가, 잠수함을 건조하는 일은 제너럴 다이나믹스가 맡게 되었다. 리코버는 잠수함의 일부가 설계도면 대로 건조되지 않자 모든 계통을 처음부터 다시 제작하게 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소련이 원자탄 개발에 성공하다.

1949년에는 소련이 원자탄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을 크게 긴장시켰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했던 점은 소련이 핵에너지를 민간 용도로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소련이 전력생산용 원자로를 먼저 개발한다면 미국에 엄청난 타격으로 작용할 터였다. 소련의 원조로 원자력발전소를 세우게 되는 국가는 소련 쪽으로 넘어가게 되면, 소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사이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젠하워가 유엔총회에서 원자력 관련 연설을 하다.

급기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12월의 유엔총회 연설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라는 프로그램을 선언하고 나섰다.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핵기술을 인류의 번영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특히 아이젠 하워는 개발도상국이 전력생산용 원자로를 건설할 때 미국이 이를 지원해주겠다는 내용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아이젠하워의 선언에 따라 미국 정부는 상업용 원자로를 개발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원자로 개발의 방향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이 경합하는 양상을 보였다. 리코버는 당시에 개발 중이던 항공모함용 원자로를 전력생산용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와 달리 경수로와 중수로의 장단점에 대해 숙고한 후 새로운 원자로를 개발하자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AEC의 실무진은 전력생산의 경제적 측면에서 유리한 후자를 지지했지만, 최종적인 의사결정에서는 원자로를 시급히 확보해야 한다는 국가안보적 차원의 고려가 중시되었다. 결국 미국 정부는 리코버의 제안을 수용했고, 리코버는 미국의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책임까지 맡게 되었다.

[평화를 위한 원자] 선언을 기념하여 1955년에 미국에서 발행된 우표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TMI 아이젠하워 유엔총회 연설문
"이러한 중대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미국은 여러분 앞에서, 즉 전 세계 앞에서 가공할 핵의 딜레마의 해결을 돕겠다는 결심, 즉 인간의 놀라운 발명이 인간의 죽음에 공헌하지 않고 인간의 생명에 이바지하는 방법을 찾는 데 온 마음과 정신을 바칠 것임을 서약합니다."

아이젠하워가 표방한 [평화를 위한 원자]는 [전쟁을 위한 원자탄]과 대비되는 것으로 과학의 역사상 매우 성공적인 수사적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언 이후 상업용 원자력발전소의 등장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대한 후보로는 1954년에 소련에서 가동된 오브닌스크 원전, 1956년에 영국에서 가동된 콜더홀 원전, 1957년에 미국에서 가동된 시핑포트 원전이 거론되고 있다.

세계 최초의 상업적 원전으로 평가되고 있는 콜더홀 원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TMI 세계 최초의 원전 이야기
오브닌스크 원전은 세계 최초로 민간에 의해 건설된 원전에 해당한다. 오브닌스크의 원자로는 흑연을 감속재로, 물을 냉각재로 사용했으며, 출력은 5메가와트였다. 오브닌스크 원전은 상업적 전력을 생산하는 역할과 실험용 원자로의 역할을 함께 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콜더홀 원전은 세계 최초의 상업적 원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콜더홀의 원자로는 흑연을 감속재로, 이산화탄소를 냉각재로 사용했으며, 초기 출력은 50메가와트였다. 콜더홀 원전은 상업적 목적에 주로 사용되었지만, 부산물인 플루토늄을 통해 군사적 목적에 기여하기도 했다.

시핑포트 원전은 세계 최초의 [순수] 상업적 원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핑포트의 원자로는 감속재와 냉각재로 모두 경수를 사용했으며, 초기 출력은 60메가와트였다. 시징핑포트 원전이 채택한 가압경수로는 이후 미국에서 건설된 원자로의 원형으로 작용했으며, 다른 국가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 원자로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사실상의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시핑포트 원전은 전력을 판매하는 상업용 원전이었지만, 전력 생산단가가 당시의 화력 발전소보다 10배나 비쌌다. 그것은 애초부터 경제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설계된 항공모함용 가압경수로를 도입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실제로 시핑포트 원전은 비경제성은 오랫동안 도마에 올랐다. 군사용 원자로를 바탕으로 상업용 원자로를 성급하게 만들려고 하다가 열등한 기술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상업용 원전을 판매하다.

1963년에는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과 웨스팅하우스가 [완성품 인도]방식으로 원전 판매를 시작했다. 원전 건설비용을 미리 책정해 계약한 다음 이를 초과하는 비용은 모두 원전 건설 회사가 부담하고, 전력회사는 원전이 준공된 후 [열쇠]만 넘겨받아 원전을 가동하는 방식이었다.

 

원전 붐이 오다.

이를 계기로 1965년부터 약 10년 동안에는 세계 각국의 전력회사들이 200기가 넘는 원전을 주문할 정도로 원전 건설의 붐이 조성되었다.

 

제1차 석유파동으로 원자력이 주목받다.

1973년에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는 것을 계기로 원자력은 대체에너지(화석연료를 대신해서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원자력 발전은 기존의 화력 발전에 비해 대량의 에너지 공급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대기오염을 비롯한 환경오염도 적다는 것이었다.

 

특히 프랑스와 일본은 제1차 석유파동 이후에 원전 건설 산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는데, 당시 프랑스에서는 [석유 없고 석탄 없고 가스 없고 선택 없다]는 구호가 회자되기도 했다.

 

원전 사고로 인해 원전 폐기물 처리 문제가 주목받다.

1979년의 스리마일 아일랜드 사고와 1986년의 체르노빌 사고를 계기로 원자력 발전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체르노빌 사고 이후 선진 각국은 원자력 발전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에 돌입하면서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은 물론 경제적/환경적 차원의 문제를 제기했다.

 

원자력 발전은 화력 발전보다 경제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왔지만 나중에 발생할 폐기물 처리비용과 원전 폐기비용을 고려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원자력 발전은 대기오염 물질을 거의 배출하지 않지만 방사성물질과 폐기물처리로 인해 새로운 차원의 환경오염을 유발한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원자력의 호황기가 오다.

2000년대에 들어와 원자력은 일종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기도 했다. 유가가 급등하고 석유정점이 논의되면서 원자력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이산화탄소가 지목되면서 원자력에 무게가 실리는 경향도 생겨났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사진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그러나 2011년 3월 11일에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면서 원자력이 과연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원전에서 전력을 생산하여 사용할 때는 편리하지만, 원전이 노후하거나 원전을 폐기할 때에는 통제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오늘날

현대에는 주 핵반응 물질로서 우라늄 및 플루토늄 동위 원소를 이용하여 핵분열 발전을 하고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에서 발전되어 공급하는 전기 중에 가장 많은 부분이 원자력으로부터 생산되고 있다.

 

원자력은 현대 문명의 산물로 인류에게 많은 이점이 되기도 하지만 원자력으로부터 발생하는 방사성을 가지는 부산물의 완전한 처리,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성 노출 핵무기 등 원자력을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한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으며, 앞으로의 인류 존속과 관련한 매우 중대한 과제로 남아있다.

TMI 원자력 역사를 본 결과
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앞으로도 새로운 원전을 계속해서 건설하는 것이 좋은 정책인지는 의문이다. 이미 건설된 원전을 조기에 폐쇄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기존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거나 새로운 원전을 건설하는 데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원자력의 비중을 점차적으로 줄이면서 재생에너지(화석연료나 핵연료의 경우와 달리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의 비중을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려는 실질적인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정책형성의 과정에서 원자력에 몰입된 논의를 할 것이 아니라 [에너지 전환]의 관점에서 전체적인 에너지 포트폴리오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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