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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신정은 사실 일본이 지정한 기념일이다?!" 겨울 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신정, 양력설]

by 고효길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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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내용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날짜

매년 1월 1일이다. 

 

의의/목적

시간적으로는 한 해가 시작되는 새해 새 달의 첫 날이며, 한 해의 최초 명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역사/유래

[시초] 한국에 처음 도입된 시기

189년(을미년) 음력 9월 9일 고정이 "역법을 개정하여 태양력을 사용하고, 개국 504년 11월 17일을 개국 505년 1월 1일로 삼으라" 는 조직을 내림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태양력 사용이 공식화되었고, 양력 1월 1일에 설을 쇠는 양력설이 한국에 도입된 것은 1896년이다. 즉, 음력으로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으로 1896년 1월 1일로 정한 것이다. 

TMI 신정은 사실 일본이 지정한 기념일이다?!
이 당시에 태양력의 도입(양력 달력 도입)을 얼마나 중대한 사건으로 여겼는지는 개혁을 추진하던 김흥집 내각이 조선시대 최초의 연호를 태양력을 도입했다는 의미의 건양으로 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태양력의 도입이 단발령의 시행과 함께 일본의 압력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일반 국민들에게 양력설은 일본설로 인식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양력설만을 공휴일로 정하였고, 당시의 많은 언론매체에서도 양력설과 음력설을 동시에 쇠는 것은 이중과세라고 간주하였으며, 음력설보다는 양력설을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양력설만이 공식적인 설로 간주된 반면, 음력설은 개인들이 지내는 사적인 설로 폄하되었다. 음력설에 대한 공식적인 탄압과 금지에도 불구하고 양력설을 빨리 받아들인 일부 사람들을 제외앟ㄴ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음력설을 고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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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양력설을 이어가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1949년 6월 4일 양력설을 공휴일로 정하였고, 1950년부터 이를 시행하였다. 양력설 중심의 국가정책은 일제 강점기와 달라진 바가 없었다. 1월 1일부터 1월 3일까지 휴일로 정하면서 양력설을 장려한 국가정책은 1989년까지 계속되었다.

 

음력설을 복원하다.

1985년에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 아래 음력설을 공휴일화하고, 1989년 2월 1일 대통령령인 [관공서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하루만 쉬던 음력설을 사흘 연휴로 개정하면서 명칭도 설날로 복원하였다. 이로써 음력설과 양력설 모두 사흘씩 쉬었다.

 

이후...

1991년부터 양력설의 연휴를 이틀로 줄이고, 1999년부터는 1월 1일 하루만 휴일로 지내고 있으며, 명칭도 신정이라는 표현 대신에 [1월 1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양력설은 1991년까지 음력설 대신에 한국의 공식적인 설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설에 대한 이러한 국가정책의 변화는 전통적 설에 대해 한국인들이 부여한 의미가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TMI 현재 신정에 대한 인식
현재 한국에서 양력설은 일반 국민들이 지내는 설이라기보다는 공식적으로 일년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이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는데, 공식적인 신년사나 덕담, 세화 등이 양력설 혹은 1월 1일을 기념하는 신문에 실리거나 방송에 방영되는 것을 볼수 있다. 또한 각 기업이나 관공서에서도 시무식을 1월 2일에 실시하여 양력설이 일년의 시작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생산하기도 한다.

근래에 와서 생긴 풍속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종로의 보신각 주변에 모여서 한 해가 지고 새해가 시작됨을 기념하며 1953년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된 제야의 타종행사를 경축하고, 같이 새해의 소원을 비는 행사를 가지기도 한다. 이때에 폭죽이나 불꽃놀이를 행하기도 한다. 방송국에서 제야의 타종행사를 중계하면서 이 행사에 좀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양력설(신정)에는 음력설(설날)과는 달리 마을공동체 단위의 행사는 벌어지지 않는다. 마을 단위로 벌어지는 동제를 비롯한 여러 세시는 음력설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양력설은 근래에 와서 생긴 세시로 도시와 지방의 편차가 음력설에 비해 거의 없다.

TMI 인접 국가의 신정은?
인접한 일본에서는 1872년 태양력이 채용된 이래 [원단]이라는 이름 아래 양력에 따라서 설을 쇠어 오고 있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춘절이라는 명칭으로 음력설을 지내고 있다. 북한에서는 양력에 따라서 설을 쇠다가 1989년 정무원의 결정을 통해서 음력설도 공휴일로 쇠고 있다. 북한에서 음력설은 하루만 공휴일인 반면에 양력설은 이틀간 공휴일이다.

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1월 1일이 새해 첫 날이 된 이야기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율리우스, 달력에 대한 문제를 발견하다.

기원전 46년, 로마가 사용하던 달력은 1태양년의 길이가 부정확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귀족들이 멋대로 달력을 운용해 일 년의 길이가 67일이나 어긋나는 일까지 생겼다. 당시 로마의 정권을 잡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년 ~ BC 44년)는 혼란을 야기하는 달력을 고치기 위해 고대 이집트의 태양력을 도입하게 된다.

 

소시게네스에게 자문을 받다.

율리우스는 달력을 고칠 때 세계 학문의 중심지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천문학자 소시게네스에게 자문을 받았다. 그는 이집트에서 사용되던 달격을 바탕으로 만든 태양력으로 달력을 고치도록 제안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전신 조각상 (출처: 나무위키)

오늘날 양력의 시초

최종적으로 율리우스는 1년의 길이를 365.25일로, 춘분날을 3월 23일로 정했다. 매년 춘분날이 같도록 만들기 위해 4년마다 2월의 날수를 하루 더하는 윤년을 두었다. 이 달력을 [율리우스력]이라 하며 기원전 46년 1월 1일부터 시행됐다.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하던 태양력의 원조인 율리우스력은 로마를 통해 전 세계로 전차됐고, 현재의 달력인 태양력을 사용하게된 계기가 됐다. 율리우스력은 1태양년 길이가 실제보다 11분 12초가 길기 때문에 128년이 지나면 하루의 차이가 생긴다.

TMI 율리우스력은 어떤 식으로 날짜을 만들었나...
율리우스 이전 로마 사람들은 한해의 시작 달이 3월이고 마지막 달이 2월이었다. 하지만 율리우스가 1월을 한 해의 시작달로 마지막 달을 12월로 고쳤다. 윤년 때 추가되는 하루는 두 번째 달인 2월에 넣었다. 또한 율리우스력 이전에는 1년 355일이었기 때문에 365일로 늘어난 10일을 열두 달 안에 다시 배치해야 했다.

이때 한 달을 30일, 또는 31일로 재 구성했는데, 그 기준으로 주먹이 사용됐다. 주먹을 쥐었을 때 검지 손가락 뼈를 1월로 기준을 잡고, 이를 시작으로 뼈가 튀어나온 달을 31일, 안으로 들어간 달은 30일로 오늘날처럼 배치했다.

 

율리우스력의 문제점이 생기다.

하지만 율리우스력이라고 완벽한 달력은 아니었다. 1582년이 됐을 때 13일 정도의 차이가 생겨 춘분날이 3월 10일로 옮겨갔다.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 13세는 종교적 행사로 지키는 부활절의 날짜가 제정 당시와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달력을 개정하게 된다.

 

율리우스력을 수정하여 그레고리력을 만들다.

우선 1년의 길이를 실제의 길이와 거의 같게 365.2425일로 사용하기 위해 100년마다 윤년을 1회씩 줄여 400년간 97회의 윤년을 두었다. 또한 춘분날을 3월 10일에서 부활절 제정 당시의 날짜인 3월 21일로 돌아오게 했다. 이를 위해 1582년에는 10월 4일 다음날을 10월 15일로 정해 사용했다. 이 달력을 [그레고리력]이라 한다.

허블 우주망원경이 찍은 시리우스 (출처/NASA)

TMI 그렇다면 양력에 전체적인 바탕이 되는 고대 이집트의 달력은?
현대 사회에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인 태양력의 근원은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하던 달력이라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처음에는 달의 운행만으로 고려해 만든 달력을 사용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달의 모양이 바뀌는 주기는 한 달의 길이 단위로 쓰였다. 이집트인들은 달을 관찰해 달의 모양이 완전히 바뀌는 주기가 약 29일 13시간 정도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집트 달력의 기준이 되는 시리우스
그러나 시리우스의 움직임과 나일강의 범람 등을 관찰하며 태양력을 사용하게 됐다. 시리우스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항상 과늑하던 별들 중 행성을 제외한 가장 밝은 별이었다. (시리우스는 전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로, -1.5등성이며, 분광형 A1의 주계열별이고, 거리 8.7광년이다.)

시리우스는 하루에 한 번씩 동쪽 지평선에 떠올라 서쪽으로 진다. 매일 떠오르는 시리우스가 [언제] 떠오르냐가 계절과 관련이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에 시리우스가 동쪽 지평선에 나타나면 곧 나일강의 범람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 365일이 지나면 또 다시 똑같은 현상이 반복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집트 달력의 계절
당시 이집트인들은 한 달의 길이를 30일로 하고 1년의 길이를 365일로 하는 최초의 태양력을 사용헀다. 이들은 1년의 길이를 3개의 계절로 나눴다. 나일강이 범람하는 시기를 [아케트], 물이 빠져서 파종하는 시기를 [페레트], 곡식이 자라고 추수하는 시기인 여름철은 [쉐무]라 정했다. 각 계절을 30일이 한 달 단위로 된 네 달로 배열하고 한 달은 다시 1주에 10일씩 3주로 나눠서 구성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과 비교하면 [아케트]는 [6/15 ~ 10/15 경], [페레트]는 [10/15 ~ 2/15 경], [쉐무]는 [2/15 ~ 6/15 경]에 해당한다. 한 계절은 4달, 일 년은 12달이며 일 년의 날짜 수는 360일이었다. 360일과는 별도로 5일은 당시 종교적 대상으로 믿던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 [네프티스], [세트]라는 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축제일로 정했다. 이와 같이 360일과 5일을 합쳐 1년의 길이를 총 365일로 정해 사용했고 오늘날과 같이 4년마다 별도로 윤년을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달력의 1년이 시작되는 날이 4년마다 하루씩 밀려나게 돼 고왕국 말기쯤(기원전 2,081년경)에는 무려 5개월이나 밀려났다.

 

결론

고대 이집트 달력이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두 번에 걸쳐 개덩되며 지금의 달력에 이르게 됐다. 1월 1일이 새해의 시작이 된 것은 율리우스 덕분이지만, 현재 달력의 시초는 이집트인들이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과 시리우스의 이동을 관찰해 얻어낸 과학의 산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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