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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12월 5일 네이버 캘린더 속 겨울 기념일 [무역의 날]

by 고효길 2023.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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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내용

 

날짜

매년 12월 5일이다.

TMI 매년 12월 5일인 이유는?
1964년 8월 26일 국무회의는 수출실적이 1억달러가 되는 날은 [수출의 날]로 정하기로 의결하였고, 11월 30일에 연간수출누계가 1억달러에 이르자 당일을 [수출의 날]로 정하였고, 이 후 명칭을 [무역의 날]로 변경하였으며, 2011년 12월 5일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9번째로 무역규모 1조 달러를 달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2012년부터 [무역의 날]을 12월 5일로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의의/목적

무역의 균형 발전과 무역입국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

TMI 기념일 행사 내용
기념일 행사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하며, 매년 11월 30일에 거행하는데, 장소는 일정하지 않다. 청와대와 행정부처의 고위 공무원을 비롯해 경제단체장 및 무역업체, 무역의 날 유공 수상자 등이 참가한다.

기념식에는 해외 신시장 개척과 경제 발전에 공이 큰 순서에 따라 금탑/은탑/동탄산업훈장과 산업포장, 대통경/국무총리/산업통상자원부장관/한국무역협회장 표창 등이 수여되고, 기업이나 단체에게도 수출 실적에 따라 수출탑이 수여된다. 

그밖에 부대행사로 클래식 콘서트, 경제토론회, 심포지엄, 사이버 홍보 등 다양한 행사를 치르는데, 일정한 것이 아니다.

역사/유래

1964년 8월 26일

발단은 국무회의에서 수출실적이 1억달러가 되는 날을 [수출의 날]로 하기로 의결하였다.

 

1964년 11월 30일

우리나라는 연간수출누계가 1억달러에 이르자 당일을 [수출의 날]로 정하고 대통령 참석하에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73년 3월 30일

여러 국가기념일들이 [각종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통해 정리될 때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발족일인 [중소기업의 날](5월 1일)과 대한상공회의소 설립일을 기념하는 [상공인의 날](10월 31일)을 흡수하게 되어 [수출의 날]이 더욱 확고하여졌다. 즉, 11월 30일 수출의 날에 [중소기업의 날]과 [상공인의 날]이 포함되었다.

 

1977년

우리나라는 수출 100억불 달성에 대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1981년

이때 200억불 달성 기념식을 [수출의 날]에 거행하기도 하였다.

 

1990년 1월

일부 개정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적용하여 [수출의 날]을 [무역의 날]로 고쳤다.

 

1995년, 2005년

1995년에는 수출 1,000억불 달성 기념 행사를, 2005년에는 무역 5,000억불 달성 기념 행사를 각각 거행하였다.

 

2011년 12월 5일 ~ 2012년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9번째로 무역규모 1조 달러를 달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2012년부터는 [무역의 날]을 12월 5일로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시세풍속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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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로 알아가는 지식

무역 역사

무역의 시초가 되는 배경

인류의 역사는 수렵과 농업시대를 거쳐 현재의 공업과 상업시대를 이룩하게 되었다. 공업과 상업 위주의 경제체제가 수렵과 농업 위주의 경제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후자가 개인이나 가족단위의 자급자족제도인 데 비해서 전자는 분업과 교환의 상호의존제도라고 할 수 있다.

 

분업이 더 심화되고 교환의 영역이 더 넓어지면서 보다 더 넓은 시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인간은 모든 지혜를 동원하게 되었다. 이 같은 새로운 영역에 대한 꿈이 콜럼버스마젤란을 낳게 하였고 결국 신대륙의 발견과 이로 인한 온갖 인류의 영욕을 수반하게 되었다.

자급자족 : 필요한 물자를 도움없이 스스로 생산하여 충당함.
상호의존 : 상대가 되는 이쪽과 저쪽 모두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존재함.
영욕 : 영예와 치욕을 아울러 이르는 말.

TMI 콜럼버스

본명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이며,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출신의(지금의 스페인) 탐험가, 항해사 콩키스타도르이며,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의 후원을 받아 인도를 찾아 항해를 떠나 쿠바, 아이티, 트리니다드 등을 발견했다. 그의 서인도 항로 발견으로 아메리카대륙은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에스파냐가 주축이 된 신대륙 식민지 경영도 시작되었다.

TMI 마젤란
본명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며, 16세기 초 포르투칼 태생의 에스파냐 항해가이다. 인류 최초의 지구일주항해의 지휘자이며, 마젤란해협과 태평양, 필리핀, 마리아나제도 등을 명명하였다. 마젤란의 항해로 인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시초가 되는 배경에 대한 논리

일찍이 영국의 A.스미스는 [국부론]에서 한 사회 한 나라의 경제발전은 그 시장의 크기에 제한을 받는다고 하였다 즉, 시장이 너무 협소하면 그 경제는 그 이상 발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인류의 역사는 내륙교통수단의 한계에 얽매여 침체한 사회보다는 내수로가 해운에 의하여 좀더 넓은 시장을 가질 수 있었던 사회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내수 : 국내에서의 수요
해운 : [해상 운송]을 줄여 이르는 말

TMI A.스미스
본명은 애덤 스미스이며,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유는 그가 쓴 [국부의 성격과 요인들에 관한 연구]에서 근대 경제학이 출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현실적 영역으로서의 경제사회를 정면으로 다루고 영국경험론적인 방법으로 [고전경제학]을 창시한 것은 바로 애덤 스미스였다.

 

무역은 강과 바다를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로부터...

나일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고대 이집트 문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한 메소포타미아문화, 인더스/갠지스강을 중심으로 한 인도문화, 그리고 황허강 유역의 중국 문화는 모두 큰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 후 다른 문화권은 그 이상의 바다를 이용하여 더 멀고 더 넓은 시장개척을 하지 않았으나 유독 서양문화권은 지중해를 이용한 활발한 국가간의 교역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위 내용에 대한 기록과 서양문화권이 세계를 제패한 이유

기록에 의하면 이미 BC 1000년경에 이집트와 레바논 간에는 곡물, 파피루스 및 목재 등의 교역이 성행하였으며 또 BC 800년경에는 지중해의 로도스 섬을 중심으로 한 페니키안에 의한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져 일부 상인들의 자본축적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자본축적이 신대륙의 발견과 과학의 발달을 촉진시켜 결국 무역을 일찍이 서두른 서양문화권이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다.

파피루스 : 고대 그리스어로는 파피로스, 라틴어로는 파피루스이며, 이집트 특산의 카야츠리그사 과의 식물이다. 이것을 재료로 해서 만든 필기재료(일종의 종이)와 이것에 쓴 문서 등을 뜻한다.

로도스 섬
: 로도스는 그리스 도데티사 제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그 중심지이다. 그리스 본토와 키프로스섬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페니키안 : 페니키아 사람을 칭하며, 페니키아는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해안지대, 즉 지중해 동안을 일컫는 고대 지명이다.

 

무역의 어원

영어의 [trade]는 [지나간 자국], [항로] 등을 뜻하는 [track]과 [걷다], [밟다]는 뜻을 가진 [tread]에서 유래한 것만 보아도 무역이란 어떤 길이나 항로를 따라가서 물건을 교환하는 행위를 뜻한다. 무역은 물론 서양문화의 독점물은 아니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무역이란 용어는 고대 중국의 고전인 [사기]에 기록된 '以物相貿易' 및 [십팔사략]의 '貿易衣服回轉數周'라는 표현에서 비롯한 것으로, 무와 역은 매매 또는 교환을 뜻한다.

TMI 사기
중국 전한의 역사가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이며, 상고시대의 황제 ~ 한나라 무제 태초년간(BC 104~101년)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여 저술한 세계사적인 통사이다. 이책의 가장 큰 특색은 역대 중국 정사의 모범이 된 기전체의 효시로서,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 12편, 제후왕을 중심으로 한 세가 30편, 역대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 8편, 연표인 표 10편, 시대를 상징하는 뛰어난 개인의 활동을 다룬 전기 열전 70편, 총 130편으로 구성되었다.

 

한국의 무역 기록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중국이나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 문물을 교환한 사실이 각종 기록을 통해 전해오며, 특히 통일 신라시대의 제42대 흥덕왕 때 장보고가 신라 해안에 자주 침범하는 중국해적을 소탕하고 청해진에 해상진영을 세워 이 곳을 근거지로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대규모 무역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결론

이 같이 인류의 발전사는 제한된 자기 영토 내에서의 산물로서 만족하지 않고 자국의 한계를 벗어나서 다른 나라와 서로 교역하여 살아온 나라가 더 부강해져왓던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특히 자국 영토 내에 부존자원이 빈곤한 나라에 있어서는 외국과의 교역이란 곧 생존을 의마하게 된다.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한국 무역 역사

한국 교역의 기원

한국 교역의 기원은 선사시대인 원시공동체사회 초기까지 소급해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원시사회 조직은 씨족공동체사회에서 부족공동체사회로 계기적인 발전과정을 거쳐왔으며, 특히 씨족공동체사회 초기에는 난혼형태의 가족제도에서 혈연집단이 모계씨족공동체를 형성하고, 수렵과 어로 및 채집 등의 생산활동을 하면서 유량생활을 이어왔다.

 

그리고 이들 초기의 씨족공동체는 그들이 획득한 생산물 중에서 쓰고 남은 잉여물이 생기면, 이를 다른 공동체의 잉여물과 교환하기 위하여 주변의 다른 공동체가 발견하기 쉬운 곳에 그들의 잉여물을 가져다 놓고 무언의 교역을 기다렸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교역을 침묵교환이라 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교역형태이며 원초적인 사회적 분업이기도 하였다.

원시공동체사회 : 인간이 손을 사용하여 노동을 하기 시작함으로써 다른 동물들과 구별될 수 있었는데, 그 초기단계를 원시공동체사회라고 한다. [원시적]이란 낮은 수준의 문화, 저급한 사회를 막연히 가리키는 말이지만, 국가생활이 영위되지 않은 상태, 또는 국가는 있어도 부족국가/부족연합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사회]는 공동체적 규제가 심하고 문자와 화폐경제가 존재하지 않는 문화단계에서 적용된다. 이 시기는 아직 생산력의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공동으로 일하고, 생산한 것은 공동으로 분배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씨족공동체 : 단계(부계, 모계의 어느 한쪽) 출생을 더듬어, 전설 상의 공통된 조상을 갖는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의 집단, 명칭, 의례, 물품 등 씨족공동체의 통일된 심벌이 존재하고, 같은 씨족공동체 사람끼리 결혼해서는 안 되는 외혼제를 채택한 경우가 많다.

난혼 : 남녀 성관계에 대한 규제나 혼인제도가 없어 성관계가 완전히 자유스런 상태
모계씨족 : 어머니가 속하는 씨족의 성원이 된다.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무역활동

우리 민족의 대외 교역활동이 [진서] 및 [삼국지] 등 중국측의 고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금속문화의 유입으로 생산력 수준이 눈에 띄게 높아진 부족연맹체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즉, 기원전/후기부터 부여와 고구려 및 삼한 등의 부족연맹체는 그들의 잉여생산물 혹은 특산물 등을 연맹체 상호간 또는 주변의 이민족과 빈번하게 교역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본격적인 대외무역의 기원은 부족연맹체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 ~ 조선시대 무역의 역사

삼국시대부터 중국이나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 문물을 교환한 사실이 각종 기록을 통해 전해오며, 특히 통일 신라시대의 제42대 흥덕왕 때 장보고가 신라 해안에 자주 침범하는 중국해적을 소탕하고 청해진에 해상진영을 세워 이 곳을 근거지로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대규모 무역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시대에는 벽란도를 중심으로 중국 송나라를 비롯한 여진, 거란, 동남아시아, 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와 무역을 했다. 서양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코리아](COREA)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코리아라 불리게 된 이유는 [고려]라는 나라 이름이 여러 나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사신을 통해 중국/일본과 물물교환 형식의 무역을 했다. 일본에는 통신사를 파견해 많은 문물을 전해 주기도 했다.그러나 동양에서는 교역상대국이 서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또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조선시대부터는 교역의 관건이 되는 해상운송에 종사하는 자나 어부들은 천민으로 취급받아 상류층이나 다른 생계의 수단을 가진 자들은 이 분야에 진출을 하지 않아 한국의 대외무역은 위축되었으며, 결국 대원군의 쇄국주의로 현대문명으로의 개화가 그만큼 늦어졌다고 할 수 있다.

쇄국주의 : 다른 나라와의 통상과 교역에 반대하는 사상

 

우리나라 무역의 변화와 특징

우리 민족의 역사는 전통사회, 개화기, 민족항일기 및 광복 이후의 시기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는데, 이에 따라 대외무역의 형태나 그 성격도 크게 변천되어 왔다.

전통사회 : 개인을 기초로 한 계속적 관계에 대해 공동체적/혈연적 관계가, 사회적 지위에 관해서는 업적원리보다 신분 고정적인 귀속원리가 우위가 된다. 또한 세속적/목적 합리적인 가치체계에 대해 초월적/가치합리적인 가치체계가 우위하며 또한 그것이 정치지배의 정통화 원리가 된다.

개화기 : 1876년 맺은 강화도 조약 후, 한국에서 서양 문물이 유입되어 종래의 전근대적 사회 질서 및 풍습이 타파되는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근대적 사회로 변화되어 가던 시기를 이르는 말이다.

 

먼저 원시사회에서부터 조선 말기까지를 전통사회라고 한다면, 이때 대외무역은 주로 국가간의 국신물 교환형태, 즉 국가 관리의 공무역이 우리나라 대외무역의 지배적인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정치적 의례 내지는 인접국 상호간의 교린관계에서 국가 관리형태의 공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강대국이었던 중국과의 무역은 조공형식의 공무역이 이루어졌고, 기타 약소국과의 무역은 국가간의 평화적인 교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입공 형식의 공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전통문화의 대외무역은 주로 사절단의 왕래를 통한 국신물 교환형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국신물 : 국가와 국가 사이에 신뢰를 보이기 위해 서로 교환하는 물품
공무역 : 신라와 당, 고려와 송 또는 요, 조선과 명 또는 청나라 사이에서 조공의 형식으로 정부와 정부 사이에 행하던 물물 교환.

교린 : 고려/조선 시대 외교 용어로 문자상으로는 이웃 나라와 통교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과의 외교 관계는 사대라고 하고, 중국 이외의 주변국인 일본/여진 등과의 외교 관계는 강경과 회유책을 써서 차이를 두었는데, 이를 교린이라고 하여 사대와 구별하였다.

 

즉, 사절단 일행에게 변칙적으로 허용되고 있었던 사무역을 비롯하여 국경지대의 호시무역왜관무역 등에서 묵인되고 있었던 사무역, 그리고 예외적인 것이기는 하였지만 통일신라시대의 장보고에 의한 청해진무역 등은 모두 사무역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전통사회에서는 공무역과 사무역 외에 국가의 감시를 피하여 밀무역도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통사회의 대외무역은 원칙적으로 국가관리의 공무역만이 인정되었고, 밀무역은 물론 사무역도 금하는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었다는 데 그 특징이다.

사무역 : 국가가 주도하지 않고 역관이나 상인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무역
호시무역 : 두 나라 사이의 교역
왜관무역 : 조선시대 개항장과 서울의 왜관에서 이루어진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무역이다. 무역이라고 하지만 일본인에 의한 일방적인 무역이였고, 초기에는 물물교환에 지나지 않았다.

 

개화기 무역 특징

개화기에는 열강과 개국 통상조약을 맺어 근대적인 무역관계가 형성되어갔으나, 여러 가지 여건이 성숙되지 못해 우리나라의 대외무역은 이른바 조계지무역이라는 왜곡된 형태의 근대무역이 전개되었다.

 

다시 말하면, 개화기의 대외무역은 편무적인 수호통상조약의 제약과 속박, 민족상인 자본의 미성숙 등으로 조계지의 외국상인이 자국 정부의 보호를 받으면서 우리 나라의 대외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조계지무역 : 외국인 거주지역의 무역. 외국의 경찰/행정권이 행사됨
편무적 : 한쪽에서만 의무를 짐

 

민족항일기의 무역 특징

민족항일기에는 국권의 상실로 우리 나라의 대외무역은 전형적인 식민지무역 관계로 다시 편성되었다. 즉,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 나라의 대외무역은 일본의 공산품과 우리의 공업원료 및 식량 등을 일본상인이 독점 교환함으로써 전형적인 남북무역 형태의 식민지무역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는 통제경제 체제의 강화와 더불어 관영무역 형태의 식민지무역이 전개되었다.

관영무역 : 정부가 비영리적익고 재정적인 목적으로 무역거래의 당사자가 되는 무역형태를 말한다.

 

광복 후 무역 특징

광복 후의 대외무역은 국권의 회복과 더불어 비로소 민족상인에 의한 자유로운 상사무역이 전개되었으나, 광복 직후부터 1960년대 이전의 과도기에는 정치적, 경제적 혼란의 악순환과 산업구조 후진성등으로 인해 무역 규모도 보잘것 없었고 전형적인 남북무역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상사무역 : 당사자의 양쪽 또는 한쪽에 대해 상행위가 되는 무역
남북무역 : 선진공업국과 후진국간의 무역형태를 말한다. 대체로 공업국은 온대인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고, 농/광업국은 열대인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같은 용어가 생겨났다.

 

그 후... 현재

현재 우리나라는 땅이 작고 천연자원이 많지 않아서 여러 가지 천연자원을 수입하고 있다. 특히 석유와 같은 천연자원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꼭 수입을 해야 한다. 석유를 수입하지 않으면 자동차도 달릴 수 없고 많은 공장들이 멈추게 될지도 모른다. 대신 우리나라는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만든 훌륭한 물건들을 세계 곳곳으로 수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농업을 위주로 하는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철광석, 직물, 김 등 농업 자원이나 값이 싼 천연자원을 수출하고, 완제품을 수입했다. 이후 고도 성장기에는 수출 제일주의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의 추진하였고, 1970년대에는 경제 개발이 시작되면서 섬유, 전자 제품, 철강 등의 수출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는 경제가 아주 빠르게 성장하면서 기술이 점점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는 반도체, 자동차, 컴퓨터, 선박 등을 세계 곳곳으로 수출하여 인정받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와 주로 무역하는 나라는 중국, 미국, 일본으로 전체 수출과 수입의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 세 나라의 경제 상황이 우리나라 경제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수출 제일주의 : 국가의 경제 발전을 위하여 수출을 가장 중요시하는 경제 정책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 : 수출산업 발전을 중심으로 공업화를 달성하려는 경제정책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천재학습백과 초등 사회 6-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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