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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11월] 11일 네이버 달력 가을 기념일 [해군 창설 기념일]

by 고효길 2023.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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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각종 백과사전에 흩어져 있는 내용들을

하나의 글로 정리한 내용이니 안심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기념일 내용

1. 날짜

매년 11월 11일

 

TMI 11월 11일로 정한 이유

해군의 신사도 정신을 강조하여 선비 사(士)가 연상되는 11(十一)월 11(十一)일로 정하였다.

 

2. 의의/목적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고(故) 손원이 제독의 해방병단 창단을 기념하며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을 기리고 신사도 정신을 강조하자는 의미에서 만든 기념일이다.

 

TMI

해방병단의 설립은 1894년 7월 15일 조선수군이 폐지된 지 51년 4개월 만에 우리 바다를 스스로 지키는 해군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3. 역사/유래

1945년 8월
시초 : 결단식

[조국광복에 즈음하여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동지를 구함]이라는 광고를 내 장병 200여 명을 모았고, 11월 11일 11시에 서울 관훈동 표훈전에서 결단식을 열었다.


여담

손원일 사진(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손원일

 

인물 간단 설명

지금의 해군을 만드는 데 모체가 된 [해방병단]을 창설하였고, 초대 해군참모총장, 해군 중장, 국방부장관, 주독일대사 등을 지내고 국방/외교/사회 등 각 방면에서 공헌한 인물이다.

 

일대기(역사)

1909년 5월 5일 (음력)
출생

평안남도 강서에서 2남 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인 손정도, 어머니는 박신일이다.

1915년 ~ 1925년
학교 졸업 후 취업

대한민국 상해 임시 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가서 1915년 중국 광성소학교, 1919년 길림 문관중학교를 거치고 1924년 중국 남경 중앙대학 농학원 항해과를 졸업하고, 중국 해운공사에서 근무하였다.

1927년
독일로 잠시 떠나다

1927년 중국 해군의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3년간 독일에서 수학하였다.

1930년 ~ 1931년
귀국 후 체포당하다

1930년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의 사망으로 일시 귀국하였다가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상해독립단체의 비밀연락원의 임무를 띠고 입국하였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강서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에 출감하였다. 출감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해운사업에 종사하였고, 동화 양행이라는 무역 회사를 설립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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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일은 회사수입의 일부를 중경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1945년
조국으로 귀국 후 해방병단 창설

1945년에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였다. 이후 조국의 바다를 지키기 위한 해군을 건설할 뜻을 품고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고, 8월 21일 동지들과 해사대 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 그 뒤 미군정이 실시되자 그는 미군정 당국과의 협의 끝에 11월에 해안경비를 담당할 해방병단을 창설하고 초대 단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체계를 조금씩 갖추다.

2월 장교에 대한 계급이 부여됨에 따라 참령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해 6월에는 해방병단이 해안경비대로 개칭되어 해안경비대 총사령관 겸 병학교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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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해안경비대에서 해군으로

8월 정부가 수립되어 해안경비대가 해군으로 편입됨에 따라 초대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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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참모총장 재직 중에는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해 해군전력 증강에 기여하였으며, 특히 6/25전쟁 중에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53년
해군중장 예편, 국방부장관으로 취임

6월 해군중장으로 예편한 뒤 그 해 8월 제5대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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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능숙한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막대한 군원을 획득함으로써 국방력 증강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행정면에 있어서도 국군묘지 창설, 군목제도의 활성화, 전시연합대학과 국방대학원 창설, 국내외 위탁교육제도의 신설 등 인재양성에도 공헌하였다.

1956년
주독일대사로 임명되다.

주독일대사(서독대사)로 임명되어 3년간 외교 일선에서 국위선양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히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의 각종 국제회의에 대표로 참석하는 등 1인 10역의 눈부신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67년 재향군인회 고문, 1971년 성우구락부/서해구락부/국토통일원 고문, 1972년 홍보협회장, 1972년~1974년 한국반공연맹 이상장 겸 세계반공연맹 아시아반공연맹 이사장, 1974년 반공연맹 고문, 국제문화협회 상임고문, 1976년 대한석탄공사 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1980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해군 로고

해방병단

 

간단설명

8/15광복 직후 해군창설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던 해사협회가 주축이 되어 미군정청의 인가를 받아 결단된 해사관계 군사단체이다.

 

역사/유래

1945년
결단식으로 시작

11월 11일 해사협회 동지 70명과 미군정청 해사국장 및 국내 해사관계 인사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의구 표훈전에서 결단식을 가졌다. 손원일이 초대 단장에 취임하였고, 임무는 총인원 200명으로 해안경비대를 창설하고, 본부를 진해에 설치하는 일이었다.

 

해방병단은 현 통제부의 항만과 청사건물 1동의 사용허가를 받아 인원 77명으로 시무식을 가졌으나, 해방병단에 대한 해사국으로부터의 예산영달이 따르지 않아 심한 재정난/식량난으로 한때 단원이 37명으로 감소하였다.

 

미군정청에서는 1945년 군정법령 제28호로 국방사령부를 설치하였으나 해방병단은 그 휘하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12월 간부 몇 명이 상경하여 단원을 증모하고, 해방병단의 기간이 될 사관후보생을 모집하였다.

 

TMI 해방병단 창설의 경과

결단식에 앞선 11월 손원일이 미군정청을 방문, 해사협회에서 한국해군 창설의 소임을 담당하겠다고 제안하고, 미군정청 해사국장으로부터 해사협회가 주동이 되어 한국 연안의 경비와 밀수방지 및 조난선의 구조등을 내용으로 하는 해안경비대의 창설을 제의받은 데에서 비롯되었다.

시무식: 연초에 근무를 시작할 때 행하는 의식
증모하다: 정원보다 더 늘려 모집하다.
주동되다: 어떤 일에 주장이 되어 움직이다.
주동: 어떤 일에 주장이 되어 움직임 또는 행동하는 사람, 주체가 스스로 동작이나 행동을 하는 동사의 성질.
1946년
나라의 편입되고, 형편이 나아지다.

1946년 1월에 군정법령 제42호에 의거하여 국방사령부로 편입되었고, 1월 17일 통제부 안에 해군병학교를 창설했다. 2월부터 장교급에 대한 계급 부여가 시작되었으며, 2월 1일에는 공작부를 설치하였고, 3월 3일에는 군의 풍기유지와 좌익계열의 해안침투를 막기 위하여 해헌대를 창설하였다.

 

3월 법무관실이 설치되었고, 4월에 부족한 예산 문제가 해결되며 군악대 창설과 국방사령부의 지시에 의하여 해방병단 인천기지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6월 사병에 대한 계급제도가 제정되었다.

 

TMI

해방병단원은 진해에 내려온 첫날부터 군항 내의 시설 사용이 제한되고, 장비 사용의 금지로 난관에 부닥쳤으나 자체의 노력으로 흩어진 소형배들을 모으고 조함창을 만들어 100t급 보트 1척과 증기선 2척을 보수하여 취항시켰다. 이러한 기술 축적으로 1947년 2월 300t급 쾌속철함 충무공정을 건조하였다.

좌익: 국가나 정권의 지배이념과 정책을 반대하고 대립되는 일체의 세력을 가리키는 말
조함창(造艦廠) : 큰 배(군함)를 만드는 공장
취항하다: 배 따위가 항구에 나아가 취역하다.
취역하다: 노동 일에 종사하다, 새로 건조된 군함이 임무에 종사하게 되다.
이후...

해방병단은 국방사령부가 국방부로 개칭된 뒤 1946년 6월 통위부로 개편되면서 조선해안경비대라는 새 명칭으로 바뀌었다.


조선해안경비대(최초의 해상경비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해안경비대

 

간단 설명

1946년 창설되었던 한국 해군의 전신이 되는 국방기구

 

역사/유래

1946년
명칭이 바뀌다.

6월 해방병단이 통위부 산하의 부대로 승격된 것으로서 해안경비 임무를 수행하였다. 6월 15일 군정법령 제86호로서 통위부 산하 조선해안경비국이 조선해안경비대를 관할하게 되자 해방병단 총사령부는 1월 14일부로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부로 소급하여 개칭하게 되었다.

 

TMI

해방병단은 1945년 11월 광복 후 해사관계 단체인 조선해사협회의 건의에 따라 경상남도 진해(현재의 해군통제부)에서 70명의 인원으로 발족된 군사단체로 해안 및 도서순찰임무를 맡아왔다. 해방병단은 정식 군사조직이 아니었으므로 재정적 곤란이 컸으나 일본해군이 남기고 간 공작시설을 확보하여 조합창을 세우고 폐선을 수리하여 취항시키는 등의 활약을 하면서 1,000명에 가까운 대원들을 확보하였다.

 

1947년
기지 설치와 승격

1947년 진해/인천/목포/묵호/군산/포항/부산 등지에 기지를 설치하고, 정부수립직전까지 병력 3,000명, 함정 105척을 확보하였으며, 정부가 수립되면서 해군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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