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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민주운동" 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2/28 민주운동 기념일]

by 고효길 2023.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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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내용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날짜

매년 2월 28일이다.

의의/목적

1960년 2월 28일 당국이 야당의 선거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에 등교조치한 데 반발, 대구시내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사건을 기념한 법정기념일.

 

즉, 1960년 2월 28일 정부와 여당의 부당한 선거개입에 항의하며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벌인 학생시위를 기념하기 위한 법정기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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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래

2/28 민주운동이 일어나기 전 상황

경북고 학생들의 2/28시위는 새로운 학생운동의 첫 출발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학생들은 이승만 정권이 수립된 이래 학도호국단으로 묶여 권력이 요구하는 관제 시위를 벌였다. 1950년대 내내 북진멸공/반공방일 시위에 동원되었고, 고위 관료가 행차를 해도 연도에 늘어서서 박수를 쳐야 했다. 그런 학생들이 현실을 비판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인 것이다.

TMI 그밖에 1950년대 학생 시위/상황
1950년대에 학생들의 비판적인 시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6년 5월 5일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돌연히 사망해 운구가 서울역에서 효자동 자택으로 옮겨질 때 격렬한 시위가 발생해 7백여 명이 연행됐든데, 이 시위에 대학생들이 다수 가담했다.

1957년 4월에는 이기붕의 장자로 이승만의 양자가 된 이강석이 입학시험 없이 등록하자 서울대 법대생들이 며칠간 동맹휴학을 한 바 있었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에 묶여 있었고,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1959년 가을에는 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들로 구성된 전국대학생구국총연맹이 자유당 후보 선거운동에 나서는 실정이었다.

어불성설 :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뜻. '말도 안 된다'라는 뜻

 

2/28 민주운동 현장 사진 [출처 : 민주마실 공원나들이 블로그]

2/28 민주운동의 시초

1960년 3월 15일로 예정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1달 정도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는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의 선거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때 자유당 경북도당은 1960년 2월 10일, 대구시내 각 기관장과 각급학교장을 소집하여 2월 27일 토요일 오후 1시에 있을 예정인 자유당 대통령 선거 유세와 관련하여 지시를 내렸다.

TMI 자유당 대통령 선거 유세와 관련한 지시 내용

첫째

자유당 유세장에 가구당 1명씩 동원하고, 다수가 유세장에 참석할 수 있도록 낮 12시까지 업무와 수업을 모두 끝낼 것.

둘째
민주당 유세날인 28일 일요일에는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유세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동회와 직장 단위로 각종 행사를 계속할 것.

셋째
특히 고교학생들은 정치에 민감하므로 일요일에 일제히 등교시켜 민주당 유세장에 나가지 못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대구 지역 학생들이 들고일어난 것은 직접적으로는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일요일인 2월 28일 대구에서 유세를 벌이자 당국이 학생/공무원/노동자/시민들이 유세장에 나가지 못하게 엉뚱한 짓을 했기 때문이다. 경북고의 경우 2월 25일에 3월 3일 치르게 되어 있는 학기말 시험(당시에는 3월이 아니라 4월에 새학기가 시작되었다.)을 일요일인 2월 28일 치르겠다고 했다. 28일 대구고교는 토끼사냥을, 대구상고는 졸업생 송별회를, 경북대 사대부고는 임시수업을 하기로 했다.

2/28 민주운동 현장 사진 [출처 : 민주마실 공원나들이 블로그]

2/28 민주운동 시작되다.

1960년 2월 28일 낮 12시 50분, 경북고 학생 부위원장 이대우가 학교 운동장 조회단에서 결의문을 읽었고, 경북고생 800여 명이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구 시내 중심가로 나가 시위를 벌였다. 뒤이어 대구고, 경북여고, 경북사대부고 학생들이 시위를 감행하였다. 대구 시내 1,500여명의 고등학생들이 정부의 선거 방해 공장에 맞서 이에 저항하는 시위를 전개했으며, 학생들은 경찰과 충돌해가며 경북도청에 이르러 시위를 벌였다.

 

경북고 학생들은 오후 1시 30분경 도청에 들어가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연행되면서 3시경까지 데모를 했으며, 120여 명이 연행되었다. 대구고교는 2시부터 30분 동안 시위를 벌였다. 경북대 사대부고는 학생들을 강당에 가두었고 경북여고는 교문을 걸어 잠갔으나 일부 학생들은 시위를 벌였다.

 

2/28 민주운동 이후.

2월 28일 이후 학생들은 30여 년 동안 불의와 부정, 독재, 민족문제, 민중생존 문제에 대해 시위 등을 통해 발언을 했다. 극우반공체제에서 진보적 정치세력이 활동할 수 없게 되자 학생들이 앞으로 30여 년 동안 그 역할을 대신 떠맡는 세계역사상 희귀한 사례가 시작되고 있었다.

 

2월 29일에도 경북여고/대구여고/대구상고의 일부 학생들이 데모를 했다.  경찰은 시위에 참가한 학생 250여 명을 연행하였으나, 민심을 자극할 것을 우려해 이날 밤 모두 석방조치하였다. 그러나 주모자들에게 미행을 붙이고, 교사들로 하여금 매일 가정방문을 하게 하는 등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이후 3월 2일 이강학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괴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론

2/28대구학생시위는 그 이전까지 흔히 볼 수 있었던 정부에 의해 동원된 관제시위가 아닌 학생들이 스스로 조직한 자발적인 시위였다. 무엇보다 많은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을 각성시키고 불의에 대한 항거 의지를 고양시켜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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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2/28 민주운동기념회관 [출처 :  [트래블메이커] 10월의 역사투어!! “ 2...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2/28 민주운동과 같이 일어난 학생시위

서울에서 학생시위가 일어나다.

학생시위는 서울 한복판에서도 일어났다. 3월 5일 장면 부통령 후보가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운동장)에서 유세를 한 뒤 퍼레이드를 벌일 때 학생 1천여 명이 비를 맞으며 그 뒤를 따랐다. 학생들은 인사동 부근에서 경찰이 저지하자 "부정선거 배격하자", "썩은 정치 갈아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대전에서도 학생시위가 일어나다.

격렬한 시위는 3월 8일 대전고에서도 일어났다. 학생들은 그동안 [서울신문]을 강제 구독시키고 수업시간에 이승만 연설을 틀어주고 이기붕에 관한 뉴스영화를 보여주는 데 불만이 많았는데, 3월 8일의 민주당 강연회에 가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오면서 거사를 계획했다. 학생 1천여 명은 8일 스크럼을 짜고 장면 후보 강연회가 열리는 대전 공설운동장으로 학생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줄다음치다가 무장경관이 곤봉 등으로 난타하면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시위로 학생 간부들과 50여 명이 연행되었다. 10일에는 대전상고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 밖에 학생시위

3월 10일에는 수원농고생, 충주고교생도 데모를 했다. 이날 전남 광산군 송정읍에서 3인조/5인조 공개투표 모의 훈련 끝에 민주당 비밀당원이 반공청년단장에게 살해되었다. 12일 부산 해동고교생들이 학도호국단가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고, 청주고교생도 시위에 나섰다. 3월 13일에는 서울시청 앞, 명동 입구 등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학생시위가 있었다. 학생들이 시위할 때 전국대학생구국총연맹과 국정연구회에서는 가두선전차를 타고 "학생들은 자중하라"라고 소리 질렀다.

 

3/15정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고교생 시위는 한층 더 확대되었다. 3월 14일자 석간에서 한 신문은 "폭력에 떠는 3/15 분위기"라는 기사를 통해 도처에서 칼과 주먹이 난무했고, 그 와중에 김포에서 민주당 참관인이 중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이날 14일에는 포항고교생, 인천 송도고교생, 원주농고생이 데모를 하는 등 시위가 많았다. 부산에서는 동래 고교/부산상고/항도고교/북부산고교/혜화여고/데레사여고 등이 시위하면서, "우리 선배는 썩었다", "우리가 민주제단을 지키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대학생들을 불신하면서 고교생들이 민주주의를 지킬 수밖에 없다는 처절한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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