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 내용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날짜
매년 3월 1일이다.
의의/목적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로 한국의 국경일이다.
TMI 삼일절이란 도대체 어떤 날인가?
일제의 철통같은 무단통치를 뚫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이고 열정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분명한 거부와 문화적, 역사적 민족 개념에 기반한 이상적 국가 건설이라는 지향이 한국 민족 개개인에게 뿌리 내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비록 3/운동을 통해 일제 식민 통치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3/1운동은 비로소 한국 민족으로 각성시켰던 것이다.
3/1운동 이후 활동한 거의 모든 독립 운동 세력은 3/1운동을 자신들의 모태로 간주하였으며, 독립 운동의 역사적 다위성과 그들 활동의 역사적 논거로서 3/1운동을 꼽았고, 따라서 매년 이날을 기념하면서 독립을 향한 의지를 새롭게 했다.
역사/유래
3.1절 시초(3.1만세운동)
1919년 3월 1일 정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일제의 압박에 항거하기 위해 전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평화적 시위를 열었다.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은 1919년 5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TMI 삼일절 전 독립 선언서
삼일운동의 기미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기 전, 만주에서 대한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고, 일본에서는 2.8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3.1만세운동 이후
1920년 3월 1일 상해 올림픽대극장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주최한 제1회 삼일절 기념식에서 안창호가 연설을 하였고, 이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모든 세력들에게 3/1운동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적절히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같이 3/1절을 국경일로 지정하여 국경일 명칭을 [독립선언일]이라 칭하였으며, [대한인이 부활한 성스러운 날]로 내무부 포고를 공포하였다.
이후에도 3월 1일은 광복을 열망하는 독립운동가들과 온 민족에게 가장 큰 기념일이자 축제의 날이었으며, 중국, 미주 등의 해외 동포들 또한 3/1절이 되면 다양한 행사를 통해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였다.
TMI 안창호 연설 내용
"과거 일년간 일인은 이날을 무효화하려 하였고, 우리는 이날을 유효하게 하려 싸웠소. 일인의 최대 문제는 이날을 무효로 돌리는 것이고, 우리의 최대 의무는 이날을 영원히 유효하게 함이외다. ~ 그리하기 위하여 우리는 작년 3월 1일에 가졌던 정신을 변치 말자 함이요".
광복 이후
광복 이후 미군정치하에서는 1946년 2월 21일 군정법률 제2호 '경축일 공포의 관한 건'을 공포하여 경축일로 지정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대한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열사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제한되었고, 행정명령 13호 [3.1절(독립일) 기념축하식 거행에 관한 건]을 통해 지정된 장소 이외에는 축하식을 제한하였다.
특히 1946~1948년까지 해방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다투었던 각 정치 세력은 자신들이 3.1운동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삼일절 기념식을 자신의 주도로 치르기 위해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공휴일로 지정되어 임시정부로부터의 국경일 전통을 계승하였다. 이날이면 정부에서는 애국지사, 독립유공자 유족, 국가 주요인사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석한 기념식을 거행하며, 각 지역에서도 기념식을 비롯하여 1919년 3.1운동 당시 해당 지역의 만세 운동 광경의 재현과 같은 다양한 행사를 시행한다. 또한 가정과 기업 등에서도 태극기를 게양하여 이날을 기념한다.
기념일로 알아가는 상식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3.1 운동
프롤로그
1919년 3월 1일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그 때 당시 상황/배경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해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을 학살/투옥하고 모든 형태의 반일 활동을 탄압했다. 그리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했으며, 조선태형령으로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처벌을 가하여 인권을 유린했다.
헌병경찰제도 : 1910년 일제의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상징하는 경찰제도로, 헌병으로 하여금 군사경찰뿐 아니라 일반 치안 유지를 위한 경찰 업무까지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태형령 : 일제가 1912년 4월부터 1920년 3월까지 시행한 형벌 제도. 조선인에게만 적용되었으며, 일제 무단통치의 폭압성을 상징한다.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으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1910년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졌다.
TMI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
첫째는 독립전쟁론의 관점에 기초해 무장조직의 결성과 지원을 목적으로 했던 비밀결사운동이다. 대한독립의 군부, 민단조합, 광복회, 조선국민회등의 비밀결사가 각지에서 결성되어 군자금 모금과 무기구입 등을 추진했다.
둘째는 실력양성론의 관점에 기초해 종교단체와 학교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육/문화운동이다. 1910년대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각지에 설립된 사립학교, 서당, 야학 등은 3.1운동 당시 각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조직하는 거점이 되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셋째는 일제의 경제수탈에 대한 농민/노동자의 생존권 수호운동이다. 농민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토지조사사업 반대투쟁, 삼림정책 반대투쟁, 각종 조세 반대투쟁 등을 벌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주재소나 면사무소 등 일제의 통치기구를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노동자들도 민족적 차별대우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농민/노동자의 투쟁양상은 3.1운동에서도 항일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여 나타났다.
3.1운동에 영향을 준 세계사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로 한 국제정세의 변화도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쟁탈전의 성격을 지닌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열강 간의 힘 관계가 재조정되어 국제 정치의 큰 변화가 나타났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 등에서 전제국가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하여 새로 탄생하면서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특히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러시아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 치하의 피압박 민족들에게 민족 자결의 원칙을 선언하면서 식민지 민족운동들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TMI 짧게 보는 제1차세계 대전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으며,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 : 자국의 정치적/경제적 지배권을 다른 민족/국가의 영토로 확대시키려는 국가의 충동이나 정책
민족주의 :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이것을 창건/유지/확대하려고 하는 민족의 정신상태나 정책원리 또는 그 활동
사회주의 : 사회사상으로서 볼 때 자본주의의 경제적 원리인 개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치함으로써 사회를 개조하려는 사상 또는 운동
러시아 혁명 : 1905년의 제1차 러시아혁명과 1917년의 3월혁명(구력 2월)을 포함하는 러시아의 사회변혁 혁명을 일컫는다.
1918년 1월에는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여 세계의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즈음하여 나타난 이러한 새로운 시대 분위기는 국내외에서 항일민족운동의 기운을 고조시켰으며, 특히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을 [세계 개조의 신시대]로 인식하면서 독립에 대한 민족의 열망을 환기시켜 열강의 도움으로 독립을 이루려고 하였다.
상하이에서 준비하다.
상하이에서는 1918년 6~7월 무렵부터 여운형/김규식/장덕수/김철/선우혁/서병호/한진교/조동호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그 해 11월 28일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온 크레인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1919년 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파리평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김순애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의 인물들과 협의하여 대규모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했다.
미국에서의 준비
미국에서는 1918년 12월 안창호 등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가 중앙총회를 열어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등 3인을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할 것, 장래 조선의 완전 독립을 보증할 것, 조선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둘 것 등의 3개조로 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준비 (무오독립선언)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1918년 12월 조소앙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여준, 김좌진, 황상규, 박찬익, 김교헌, 안창호, 김규식 등 39명의 서명을 받아 이듬해 2월 1일 이를 발표하였다. 음력으로 무오년에 작성되어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는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의 준비 (2.8독립선언서)
일본에서는 1919년 1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도쿄의 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로 꾸며 모임을 갖고 최팔용/김도연/백관수/서춘 등 10인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해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각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송계백과 이광수 를 국내와 상하이로 파견하였고, 2월 8일 유학생 대회를 열어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2.8 독립선언서]는 일제의 국권강탈을 고발하고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였다.
국내에서의 준비
1918년 말부터 국내의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윌슨의 14개조평화 원칙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독립 요구를 위한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다 상하이, 미국, 도쿄 등지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운동의 준비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은 이승훈/양전백/길선주 등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나 국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송계백도 최린을 통해 도쿄 유학생들의 소식을 손병희/최남선/송진우 등에게 전했다.
천교도와 기독교, 학생들은 처음에는 각기 운동을 계획하다가 1919년 2월부터 함께 협의하였고, 여기에 한용운 등의 불교계 인사가 가담했다. 학생들은 1919년 1월부터 민족대표들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2월 하순 박희도와 이갑성에게 종교계의 계획에 합류할 것을 요구받고 일단 민족대표들의 계획에 합류한 뒤 3월 5일에 다시 서울에서 독자적으로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 결과 2월 18일까지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통고서 등이 작성되고, 2월 27일에는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각 종교의 교단 조직을 통해 사전에 배포되었다. 학생들은 군중 동원과 시위, 독립선언서의 배포 등의 계획을 준비하였다.
3월 1일 본격적인 독립운동
처음은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의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어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시기에는 비폭력 투쟁을 특징으로 했으며,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월 10일 전후로는 전국의 주요 도시들로 확산되었으며, 상인과 노동자들도 철시와 파업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월 중순 이후에는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시위가 일상화되었다. 농민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의 규모도 커졌으며, 시위의 양상도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의 시기에 전체 시위의 60% 이상이 일어날 정도로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폭력투쟁으로 나타났다.
3.1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그 후 결과 및 영향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는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도 커다란 타격을 가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으며,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전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이끌기 위해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국내에서는 1920년대 전반기에 민중의 투쟁력을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3.1운동의 경험을 통해 민족의 주체역량에 기초해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실력양성과 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 사이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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